[OSEN=이상학 객원기자] 지난해 두산 김경문 감독의 새로운 작품은 포수 채상병이었다. 김 감독은 지난해 시즌을 앞두고 복귀할 채상병을 위해 등번호 33번으로 따로 정해줄 정도로 남다른 기대를 걸었다. 김 감독의 기대대로 채상병은 당당히 두산의 주전포수가 됐다. 올 시즌을 앞두고 김 감독은 또 하나의 ‘등번호 정하기’를 지시했다. 이번에는 어느덧 4년차가 된 우완 투수 김명제(21)로 등번호는 27번이었다. 27번은 박명환과 다니엘 리오스가 달던 명실상부한 두산의 에이스 번호다. 4년차가 되는 김명제에게 등번호 27번은 새로운 자극제가 되고 있다. 애정 두산은 예부터 ‘돈을 쓰지 않는 구단’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두산은 FA 제도 시행 9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재정난을 겪은 현대와 함께 유이하게 외부 FA 영입이 없다. 하지만 두산이 이 같은 이미지를 깨뜨린 것은 지난 2004년이었다. 두산이 투자를 한 것은 외부 FA가 아니라 고졸신인이었다. 그해 두산은 1차 지명선수와 2차 1번 지명선수에게 도합 11억 원이라는 계약금을 쏟아부었다. 특히 1차 지명자에게는 두산 구단 역대 최고 계약금인 6억 원이라는 거액을 투자했다. 2005년 데뷔하는 신인선수 가운데에서도 최고 계약금이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휘문고 졸업을 앞둔 거물 김명제였다. 김경문 감독도 김명제에게 남다른 기대를 표했다. 김 감독과 입단 때부터 김명제에게 큰 애정을 갖고 살폈다. 2005시즌을 앞둔 전지훈련 때부터 고졸신인 김명제를 선발 로테이션에 넣을 정도였다. 김 감독은 “백마디 말보다도 경험이 먼저”라며 시범경기 때 김명제에게 사인을 내지 않았고 김명제는 2경기 10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며 단숨에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김 감독은 “김명제는 무조건 선발로 쓸 것”이라며 지지를 선언했다. 김 감독은 시즌이 개막한 이후 두 차례나 우천으로 경기가 취소되는 와중에 김명제가 부담을 갖지 않도록 선발 로테이션을 조정하기까지 했다. 데뷔 첫 해, 김명제는 김 감독의 기대와 배려에 보답하는 성적을 올렸다. 4월21일 잠실 삼성전에서 6이닝 2실점으로 데뷔 첫 승을 따냈고 이 승리로 두산은 삼성과의 3연전을 싹쓸이하며 선두로 치고 올라갔다. 4월27일 잠실 한화전에서는 7이닝 무실점으로 선발승을 거두며 팀을 4연패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해 28경기 가운데 19경기에 선발등판한 김명제는 7승6패 방어율 4.63으로 꽤 선전했다. 특히 한화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선발등판해 5이닝 무실점으로 한화 타선을 꽁꽁 묶으며 선발승을 기록, 포스트시즌 최연소 승리투수(18세9월5일) 기록도 달성했다. 애증 2년차가 된 2006년 김명제는 팀 사정에 따라 중간계투로 변신했다. 가끔 제5선발로서 선발등판할 따름이었다. 41경기 중 선발등판은 9경기밖에 없었다. 성적은 3승11패6홀드 방어율 4.46. 외관상으로는 매우 실망스러운 성적이었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얘기는 또 달라진다. 11패 중 7패가 구원패일 정도로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시즌 막판 3연승을 거두기 전까지는 승 없이 11패만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유있는 불운이었다. 신인시절과 비교할 때 이닝당 출루허용률(1.32→1.38)이나 피안타율(0.238→0.256)이 모두 상승했다. 김경문 감독은 오히려 “김명제에게 미안하다”고 말했지만 투구내용은 김명제 스스로 화를 불렀다. 결국 3년차가 된 지난해. 김명제는 믿었던 김경문 감독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트레이드가 거론될 정도로 믿음을 잃고 말았다. 박명환이 FA가 되어 LG로 이적한 가운데 김명제는 새로운 토종 에이스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막중한 부담감 탓인지 김명제는 좀처럼 기대치를 총족시키지 못했다. 시즌 전체 성적은 4승7패1세이브 방어율 5.05. 데뷔 후 가장 많은 투구이닝(117⅔)을 던졌지만, 방어율은 가장 높았다. 탈삼진은 오히려 가장 적은 63개를 잡아내는 데 그쳤으며 이닝당 출루허용률(1.47)과 피안타율(0.289)까지 데뷔 후 최악이었다. 지난해 김명제는 5회 이전 조기강판이 10회로 리그에서 두 번째로 많은 투수였다. 김경문 감독은 당근 대신 채찍을 들었다. 시즌 전만 하더라도 “우리 팀 제3선발이다. 잘해줄 것으로 믿는다”고 했지만 꽃망울을 피우지 못한 꽃은 곧 시들해졌다. 공개적으로 김명제의 트레이드를 언급했고, 2군 강등까지 지시했다. 데뷔 첫 해 열흘간 2군에 있었던 적은 있었지만 그때와는 성질이 질적으로 다른 2군행이었다. 다분히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데 대한 질책성 2군행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반기 막판부터 1군에 복귀한 김명제는 다른 사람이 됐다. 특히 8월 이후 13경기에서 3승1세이브 방어율 3.60으로 호투했고 그 중 선발로 등판한 7경기에서 3승 방어율 2.89로 특급피칭을 했다. 결국 한화와의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 6⅔이닝 무실점 선발승으로 2005년의 데자뷰를 일으키며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금 입증했다. 기대 김명제의 포스트시즌 성적은 화려하다 못해 대단하다. 포스트시즌 4경기에서 3경기에 선발등판해 2승에 방어율 0.87을 기록했다. 특히 포스트시즌에서 16이닝 연속으로 무실점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아직 한국시리즈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가을까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두산으로서는 김명제가 시즌 초반부터 꾸준하게 활약하는 것이 더욱 바라는 바다. 프로선수에게 꾸준함이란 최고의 미덕이다. 애석하게도 그동안 김명제는 최고의 미덕을 따르지 못했다. 오히려 극심한 롤러코스터 피칭으로 새가슴이라는 의혹까지 받았다. 하지만 포스트시즌 성적을 보면 김명제가 새가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리오스가 떠난 이후 두산의 27번을 단 선수는 2차 1번으로 지명한 유망한 고졸포수 김재환이었다. 현역시절 포수 출신으로 포수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김 감독이 김재환을 제쳐 두고 김명제로 하여금 27번을 달게했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김경문 감독은 김명제에게 다시 한 번 기대를 걸고 있다. 어쩌면 김경문 감독이 김명제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남다르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김명제 역시 “27번에 실린 무게감을 잘 알고 있다. 27번 투수들의 명예와 성적을 이어가도록 열심히 노력해 반드시 좋은 성적으로 보답하겠다”고 의지를 보이고 있다. 이미 지난해 막판부터 김명제는 성적뿐만 아니라 멘탈적으로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김명제는 “정신적으로 달라졌다. 예전에는 던지다 잘 안 되면 스스로 흔들렸는 데 감독님이 자신있게 던지라고 주문하셔서 생각을 바꿨다. 자신없으면 마운드에 올라가면 안 된다. 자신있게 던질 것이다”고 달라진 정신자세를 보였었다. 평균 구속이 시속 140km 중후반대를 형성하는 김명제의 공에는 힘이 있다. 볼끝도 묵직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에 자신감이 더해지면 위력이 배가 된다.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제구력이 조금 떨어져도 위력을 유지할 수 있다. 여기에 고속 슬라이더라는 무기도 있다. 설익은 아기곰의 흔적이 사라지고 어느덧 리그 4년차의 성숙한 어른곰이 된 김명제. 27번 곰 에이스의 등번호에 걸맞는 묵직한 투구로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