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비운의 투수에서 비운이 감독이 되고 말았다. 현대 유니콘스를 마지막까지 이끈 김시진(50) 감독이 ‘제8구단’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에 승선하지 못하게 됐다. 박노준 센테니얼 초대단장은 지난 3일 밤 김 감독에게 전화로 함께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이로써 김 감독은 단 한 시즌만 팀을 이끌고 지휘봉을 놓게 됐다. 마지막까지 현대 선수단을 감싸안아 온 김 감독으로서는 아쉬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비운의 투수 현역 시절 김시진은 해태 선동렬, 롯데 최동원과 함께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3대 에이스였다. 통산 성적도 화려하다. 1983년 삼성에서 데뷔해 1992년 롯데에서 은퇴할 때까지 10년 통산 124승73패16세이브 방어율 3.12를 기록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첫 개인통산 100승의 주인공이 바로 김시진이다. 1983년 입단 첫 해부터 17승을 따낸 김시진은 이듬해인 1984년 19승, 1985년 25승, 1986년 16승을 올렸고, 1987년 10월3일 OB전에서 가장 먼저 100승 고지를 밟았다. 187경기 만에 일궈낸 초고속 100승이었다. 성적만 놓고 보면 김시진은 분명 화려한 투수였다. 그러나 김시진은 큰 경기에 약하다는 치명적인 징크스가 있었다. 1984년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 3경기에 등판했으나 2패 방어율 4.33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1차전 최동원과 선발 맞대결에서 패했고, 6차전에서는 완투패했다. 삼성도 롯데에 3승4패로 패퇴했다. 이후에도 큰 경기 징크스는 계속됐다. 1986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김시진은 3경기에 등판했지만, 3패 방어율 8.53으로 힘을 쓰지 못했으며 삼성도 1승4패로 무너졌다. 1987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1·4차전에서 선발등판했지만, 2패 방어율 3.86으로 부진했고 삼성은 4전 전패로 또다시 분루를 삼켜야 했다. 한국시리즈 통산 성적은 8경기서 승리 없이 7패 방어율 5.44. 김시진이라는 투수의 이름값을 고려할 때 실망을 넘어 충격이었다. ‘새가슴 투수’라는 꼬리표까지 붙었다. 결국 김시진은 1988년을 끝으로 정들었던 고향팀 삼성을 떠나 롯데로 트레이드됐다. 롯데에서 김시진은 더이상 과거의 명성을 회복하지 못했다. 두 자릿수 승리도 거두지 못했고, 2점대 방어율도 찍지 못했다. 전성기 시절 무리한 연투에 따른 피로누적과 부상으로 선수생활 말년을 쓸쓸히 보내야 했다. 그렇게 롯데에서 은퇴한 김시진은 더이상 고향팀 삼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명성에 걸맞지 않는 큰 경기 징크스와 쓸쓸한 은퇴로 그는 비운의 투수가 됐다. 최고의 투수코치 하지만 김시진은 최고의 투수코치로 재탄생했다. 1993년 태평양 돌핀스 투수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 1996년 실업팀 현대 피닉스에 코치로 부임하며 현대와 인연을 맺은 김시진은 2년 후인 1998년부터 프로팀 현대 유니콘스 투수코치로 발돋움했다. 1998년은 현대가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달성한 해다. 그 중심에는 막강한 마운드가 있었다. 당시 현대는 팀 방어율 3.03을 기록했는데 이는 1994년 이후 최저 팀 방어율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특히 그 해 현대는 선발투수 전원이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하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세웠다. 정민태(17승)·정명원(14승)·위재영(13승)·김수경(12승)·최원호(10승)가 그 주인공이었다. 특히 고졸신인 김수경은 신인왕까지 차지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순전히 김시진의 능력이라고만은 볼 수 없었다. 이미 현대는 창단 첫 해였던 1996년에도 리그에서 가장 좋은 팀 방어율(3.04)을 기록한 바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김시진은 투수코치로서 역량을 다시 한 번 입증하기 시작했다. 정민태를 20승 투수로 키워내며 팀 방어율 2위로 이끌었고 2000년에는 가지고 있는 잠재력을 발산시키지 못하던 임선동을 부활시키는 능력을 발휘했다. 특히 2000년에는 18승의 정민태·임선동·김수경을 초유의 공동 다승왕으로 배출했다. 2000·2001년 2년 연속으로 팀 방어율 1위도 역시 현대의 몫이었다. 이때부터 현대에는 ‘투수왕국’이라는 멋들어진 별칭이 붙었다. 2001년을 끝으로 현대는 더이상 팀 방어율 1위에 오르지 못했다. 정민태가 일본으로 떠나고 임선동과 김수경이 기량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의 투수왕국 명성은 그대로였다. 특히 2002년 조용준, 2003년 이동학, 2004년 오재영을 차례로 신인왕으로 만들었다. 투수코치 김시진의 힘이 아니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 3년 연속 신인왕 투수 배출이었다. 비단 신인뿐만이 아니었다. 셰인 바워스, 마이크 피어리, 미키 캘러웨이 등 외국인 투수들도 하나같이 특급이었다. 콧대 높은 외국인선수들도 하나같이 김시진의 지도력에 엄지를 들었다. 그리고 2006년 김시진은 장원삼이라는 작품을 남기며 투수코치로서 마지막을 장식했다. 비운의 감독 2006년 11월 김시진은 현대 제2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전임 김재박 감독이 LG로 떠나며 공석이 된 자리에 현대는 김시진을 앉혔다. 그러나 김시진 감독을 둘러싼 환경은 좋지 않았다. 이미 현대는 가세가 기울어진 집안이나 다름없었다. 자금 지원이 끊겨 큰 전력 보강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구단 매각문제가 터지며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당장 팀 전력을 끌어올리는 것만큼 선수들의 사기를 충전하는 것이 신임 감독에게 주어진 큰 과제였다. 과거 ‘비운의 투수’라는 이미지가 남았던 김시진 감독에게는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었다. 김 감독은 “야구는 투수놀음이다. 끈기와 열정을 심어 9회말까지 포기하지 않는 팀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 감독의 현대는 투수들이 약했고, 9회말 패배를 받아들이는 순간은 더욱 많아졌다. 외국인선수 캘러웨이가 중도하차했지만 대체 선수는 생각도 못했다. 하지만 현대는 명가의 힘을 잃지 않았다. 비록 시즌 막판 하락세를 보였지만 여름까지 4강 진출을 호시탐탐 바라볼 정도로 저력을 발휘했다. 최종성적은 56승1무69패, 승률 4할4푼8리로 전체 6위. 전 시즌 페넌트레이스 2위에 올랐던 팀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자못 실망스러울지 모르나 시즌 내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화약고를 안은 팀이 거둔 성적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오히려 박수받아 마땅한 성적이었다. 실제로 현대의 2007년 승률은 역대 매각 직전 팀들 중 가장 높았다. 김 감독은 특유의 인화력과 믿음으로 선수단을 다독이며 잘 이끌었다. 팀 패배에 따른 책임을 ‘내 탓이오’를 외치며 자신에게 돌렸다. 애꿎은 선수들에게 화살이 가지 않도록 스스로 화살받이를 자처했다. “야구는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내 색깔도 선수들이 만들어주는 것”이라며 선수들을 위한 야구를 하겠다는 취임일성을 실천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선수뿐만 아니라 팬들을 위한 배려도 잊지 않았다. 5월5일 어린이날 SK와의 수원 홈경기에서 경기 종료 후 선수단과 코칭스태프가 모두 그라운드로 나와 관중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날 현대는 SK에 7-15로 역전패했지만 “주말 경기에서는 전 선수단이 승패와 상관없이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리겠다”고 말했고 마지막까지 이를 실천했다. 10월5일 한화와의 수원 최종전이자 현대의 마지막 경기에서도 그라운드에서 팬들을 직접 맞은 김 감독이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끝내 목숨이 다한 현대의 운명에 눈물을 훔칠 수 밖에 없었다. 김시진 감독은 시즌이 종료된 이후에도 현대 선수단과 코치진을 보듬고 다독이며 이끌었다. 시즌 막판 STX의 협상 무산에 이어 연초 KT의 창단 무산으로 절망적인 상황에 몰렸지만, 훈련에 훈련을 매진하며 낭떠러지로 내몰린 선수단을 지휘했다. 이후 센테니얼이 창단을 선언하며 현대 선수단을 모태로 삼을 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김시진 감독은 애석하게도 새 구단의 창단 감독이 되지는 못했다. 서울의 3번째 구단으로 새로운 바람을 몰아야 할 센테니얼 입장에서는 현대 색깔이 강한 김시진 감독과 함께 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딱 한 시즌의 지휘봉을 놓게 됐지만, 김시진 감독은 마지막까지 선수단을 챙겼다. “새 구단에서 계약을 안 한다고 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다른 코치들과 선수들은 계약이 잘됐으면 좋겠다”. 비운의 감독이 된 김시진은 그렇게 마지막까지 현대의 마지막 유산을 챙겼다. 현대와 함께 ‘감독 김시진’도 일단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