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EN=이상학 객원기자] 지난 시즌 전주 KCC는 창단 이래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전신 대전 현대 시절 포함해 첫 최하위라는 수모를 당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다. 외국인선수 농사에 실패했고, 주축 선수들의 부상이 돌림병처럼 퍼졌다. 허재 감독의 머리는 ‘백발’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올 시즌 KCC는 명예 회복에 성공하고 있다. 시즌 43경기에서 26승17패, 승률 6할5리로 단독 4위에 올라있다. 4강 플레이오프 직행티켓이 주어지는 2위 자리도 가시권이다. 그 중심에 바로 ‘국보급 센터’ 서장훈(34·207cm)과 ‘국보급 포워드’ 추승균(34·190cm)이 있다. 국보 1호 숭례문은 허무하게 전소됐지만, 한국농구의 1974년생 동갑내기 두 국보는 끄덕없다. ▲ 추승균의 기회 지난 시즌 KCC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두 말할 것 없이 외국인선수 선발 실패다. KCC는 외국인선수만 부상과 기량 미달을 이유로 4번이나 갈아치웠다. 전통의 명문 구단이 무너지는 건 하루 아침이었다. 하지만 외국인선수 농사가 전부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 모르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추승균의 부상이었다. 추승균은 부상과는 일면식조차 없는 선수였다. 지난 시즌 전까지 9시즌간 결장한 경기는 12경기뿐이었고, 그 중 11경기는 199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 차출로 어쩔 수 없이 결장한 경기들이었다. 나머지 1경기도 시즌 막판 순위가 결정된 가운데 배려 차원에서 결장한 경기였다. 부상으로 인한 결장은 단 한 경기도 없었다. 그런 추승균이 지난 시즌 경기 중 불의의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무려 14경기에 결장했다. KCC는 추승균이 결장한 14경기에서 3승11패로 무너졌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코트에서 묵묵히 뛰었던 추승균의 공백은 KCC에게 너무나 생소한 일이었다. 그 부상만 아니었더라면 프로농구 최초의 500경기 출장은 주희정(KT&G)이 아니라 추승균의 차지가 됐을 것이다. 물론 추승균은 주희정에 이어 프로농구 사상 두 번째로 500경기 출장을 세웠다. KCC는 지난 몇 년간 줄곧 세대교체가 지연되고 있었고 추승균도 무너져가는 명가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무너진 명가를 되살리고 재건하는 데까지 걸릴 시간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낙담해있던 추승균에게 찾아온 선물이 바로 서장훈이었다. 비록 서장훈 영입 과정에서 추승균은 이상민이라는 잊지 못할 일생일대의 파트너를 잃는 아픔도 있었지만, 추승균에게는 아픔이 곧 기회였다. 프로 입단 전까지 줄곧 비주류 팀에서 원맨쇼를 펼쳤던 추승균에게 서장훈이라는 존재감 큰 센터는 진귀함이었다. 물론 국가대표팀에서 서장훈과 손발을 맞춘 전례가 있지만, 국내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시즌 초반에는 서장훈-브랜든 크럼프 트윈타워와 함께 하느라 뻑뻑한 감이 많았고, 추승균 스스로 코트밸런스를 잡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코트밸런스를 잡은 것은 추승균이었다. 추승균은 올 시즌 43경기 전경기에 출장하고 있다. 그러나 득점은 평균 11.7점으로 데뷔 후 가장 낮다. 하지만 그 누구도 득점이 떨어졌다고 추승균에게 돌을 던지지 않는다. 추승균은 득점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KCC 높이의 농구를 살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굳이 자신이 득점하지 않아도 팀이 굴러가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팀에는 공격할 선수들이 많다. (서)장훈이나 외국인선수들에게 패스를 많이 하고, 공격이 안 풀릴 때 직접 공격하면 된다. 개인공격에 신경쓰면 팀이 죽는다”는 것이 추승균의 말이다. 추승균은 KCC 골밑을 살리는 패스·돌파·외곽슛을 모두 갖춘 최고의 골밑 도우미다. ▲ 서장훈의 회귀 서장훈이 KCC로 팀을 옮긴 데에는 이상민이라는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이상민이 자신 때문에 10년 넘게 몸을 담았던 팀을 떠나버렸다. KCC로서는 서장훈의 공허한 마음을 달래줄 길이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KCC에는 이상민 못지않은 파트너가 있었다. 추승균이었다. 서장훈은 프로 입단 전부터 동료복이 많은 편이었다. 연세대에서 이상민을 만난 건 이상민 본인에게도 굉장한 축복이었지만, 서장훈에게도 큰 복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골밑으로 볼을 넣어줄 수 있는 포인트가드와 궁합을 맞추는 것은 센터에게 큰 행복이다. 요즘 서장훈은 또 다시 그런 행복을 느끼고 있다. 1974년생 서장훈은 어느덧 우리나이 35살의 베테랑이 됐다. 세월이 참 빨리도 지나갔다. 지난 몇 년간 보이지 않게 서장훈의 노쇠화도 진척됐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당시 최부영 대표팀 감독은 “서장훈이 센터본능을 잃었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미 서장훈은 외국인선수들 사이에서 골밑이 아닌 외곽으로 나와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팀 전술 때문이었다. 골밑을 외국인선수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골밑과 외곽을 오가며 ‘서장훈 효과’를 최대한으로 살린다는 계산이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삼성은 한 차례 우승도 차지했다. 그러나 서장훈이 전성기처럼 압도적 힘으로 골밑을 지배했다면 굳이 그런 방식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올 시즌을 앞두고 서장훈은 공식 포지션을 센터에서 포워드로 바꾸었다. 하지만 올 시즌 서장훈은 다시 센터 본능을 회복했다. 득점은 데뷔 후 가장 적은 평균 15.8점이지만, 시즌 초반 부진으로 기록을 까먹은 탓이다. 지난 2시즌간 리바운드를 평균 5.4개에 그쳤지만 올 시즌에는 평균 7.3개를 잡아내며 이 부문에서 당당히 국내선수 전체 1위에 올라있다. 이와 함께 2점슛과 3점슛 시도 비율도 지난 2시즌 동안에는 3.0대0이었으나 올 시즌에는 5.1대0으로 2점슛 시도가 부쩍 늘어났다. 외국인선수의 하향평준화로 서장훈이 골밑에서 플레이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사람은 제 자리를 지킬 때 빛을 보는 법이며, 올 시즌 골밑의 서장훈 모습이 딱 그렇다. 서장훈이 가장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바로 추승균이다. 시즌 초반 KCC의 모습은 뻑뻑함 그 자체였다. 크럼프는 로포스트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고, 제이슨 로빈슨은 1대1 공간을 마련하는 데에만 신경썼다. 조직력이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KCC에서 질서를 잡아준 사람이 추승균이었다. 추승균은 자신의 공격기회를 줄이는 대신 코트밸런스를 잡고, 골밑으로 패스하며 높이를 살리는 농구에 집중했다. 서장훈이 순간적으로 찬스가 날 때 가장 효율적으로 볼을 투입하는 선수도 추승균이다. 서장훈 역시 더블팀이 몰릴 때 가장 믿고 볼을 빼주는 선수도 다름 아닌 추승균이다. 추승균은 볼 없을 때 움직임이 좋은 선수 중 하나다. 서장훈에게는 더없이 좋은 파트너다. ‘센터’ 서장훈은 “그만두는 날까지 더 많이 골 넣고, 더 많이 리바운드 잡을 것”이라고 의욕을 불태우고 있다. ▲ 농구의 교본들 서장훈과 추승균은 기록에서도 전설의 반열에 올라서고 있다. 프로농구 최초의 개인통산 1만 득점 고지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는 서장훈은 10시즌 통산 442경기에서 총 9703점을 기록하고 있다. 오래 뛴 것도 대단하지만 서장훈이 얼마나 엄청난 파괴력을 보여주었는지 잘 나타나있다. 통산 평균 득점이 무려 22.0점이다. 통산 10시즌 이상 뛰며 평균 득점 22.0점을 기록할 선수는 당분간 나타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리바운드에서도 서장훈은 통산 3972개로 이 부문에서 독보적인 1위를 달리고 있다. 통산 리바운드는 평균 9.0개. 통산 기록이 더블-더블에 근접한 선수가 서장훈이다. 추승균은 또 어떠한가. 11시즌 통산 521경기에서 7807점을 기록하고 있는 추승균은 전형적인 득점기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통산 득점에서 역대 3위에 올라있다. '소리없이 강한 남자' 다운 노력과 인내에서 나온 꾸준함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 추승균은 통산 출장경기수에서도 주희정(540경기)에 이어 역대 2위에 올라있다. 경기 출장률도 94.4%로 주희정(98.5%) 다음이다. 프로농구에 개근상이 있다면 아마 주희정과 추승균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만큼 두 선수는 성실성과 자기관리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특히 추승균은 30줄에 접어든 후에도 꾸준한 출석률을 자랑하고 있다. 서장훈과 추승균은 농구의 교본으로 자리매김한 지 오래다. 센터로서 서장훈은 체격조건과 슛 감각을 타고났지만, 골밑 위치선정이나 더블팀에 대처하는 능력은 매우 영리하고 침착하다. 최근에는 훅슛까지 개발, 센터본능을 완전히 찾았다. 추승균은 설명이 필요없는 최고의 공수겸장 포워드다. 팀과 벤치가 원하는 역할을 언제 어떤 식으로든 능동적으로 따르고 있다. 미래의 농구선수를 꿈꾸는 꿈나무들은 농구교본을 볼 시간에 서장훈과 추승균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집중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모른다. 그들은 이미 한국농구의 교본으로 부족함없는 살아있는 전설들이다. 물론 더 높은 전설이 되기 위해서는 우승반지가 필요하다. 서장훈은 2회, 추승균은 3회 우승 경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이제 그들을 코트에서 볼 날도 많이 남지 않았다. 변함없이 놀라운 기량을 발휘하고 있지만 농구선수에게 노쇠화는 순식간이다. 그들에게 올 시즌 우승이 더욱 더 절실한 이유다. 외국인선수들은 우승을 향한 절대적인 키지만, KCC는 꼭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KCC 외국인선수 크럼프는 “서장훈과 추승균이라는 베테랑 선수들이 있기에 우리가 잘할 수 있다. 두 선수에 의해 앞으로도 더 승리하고, 최상의 완성도를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