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기, "올 시즌 ML 승격 기대하세요"
OSEN 기자
발행 2008.03.08 09: 59

[OSEN=레이크 부에나비스타(플로리다), 김형태 특파원] "성기 정? 메이저리그 경기장에 가보세요". 정성기(29)를 찾는 것은 의외로 쉬웠다. 머나먼 한국에서 온 더블A 투수를 구단 직원들이 알기나 할까 하는 걱정은 기우였다.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관계자들은 정성기의 이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플로리다주 올랜도 인근 디즈니월드 초입에 위치한 와이드 월드 스포츠 단지(Wide World of Sports Complex). '당연히' 마이너리그 훈련장으로 향한 발걸음은 직원의 설명을 듣고 바로 옆 챔피언 스타디움으로 바뀌었다. 애틀랜타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8일(이하 한국시간)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와 홈 시범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곳에 정성기도 있었다. 기자실 한쪽 벽에 붙어 있는 경기 출장 명단은 그의 신분을 알려줬다. '예비선수(Extra Dress) 87번 정성기'. 언제 등판할지 모르는 '5분 대기조'라는 의미다. 애틀랜타 선발 마이크 햄튼이 2회 투구 도중 사타구니 부상을 당하자 이날 경기 등판 가능성이 높아졌다. 실제 경기 후반 정성기는 우측 외야 펜스 뒤 불펜에서 잠깐 몸을 풀었다. 그러나 보비 콕스 감독은 9회초 마지막 투수로 정성기 대신 또 다른 예비 투수 마이클 닉스를 내세웠다. 경기 후 덕아웃으로 내려가자 정성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는 바로 옆 건물 지하의 마이너리그 클럽하우스에 있었다. 운동선수로는 꽤 왜소한 체구. 메이저리그도 아닌 더블A 투수. 하지만 그의 이름은 구단 내에서 꽤 유명했다. '밀크 하우스'라고 이름 붙여진 마이너리그 클럽하우스 건물 앞에서 대화를 시작했다. -40인 로스터에도 없고, 메이저리그 캠프 초청선수도 아닌데 어떻게 메이저리그 시범경기에 참가했나. ▲원래 구단은 이번 봄에 나를 메이저리그 캠프에 합류시킬 계획이었다. 지난해 애리조나폴리그(AFL)에 참가했을 때 그런 계획을 전해들었다. 하지만 이번 겨울 구단이 여러 건의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면서 자리가 없어졌다. 그래서 비록 신분은 마이너리거이지만 가끔씩 메이저리그 경기를 준비한다. 나를 포함해 7명 정도가 대상인데, 한 번 등판하면 이틀간 마이너 캠프에서 훈련하고, 다시 빅리그 경기를 따라다닌다. -지난해 구단이 선정한 싱글A '올해의 투수' 상을 받았다. 구단은 기대가 큰 모양인데. ▲2004년 군대를 가게 됐을 때 "다 끝났다. 이제는 모든 게 물거품이 됐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구단은 '무슨 소리냐'며 격려했다. 미국 진출 첫 해인 2003년 롬(싱글A) 투수코치였던 켄트 윌리스라는 분이 있다. 지금은 마이너리그 순회 코디네이터인데 구단 투수코치 중 서열 1위다. 2003년 나를 곧바로 팀 마무리로 승격시켜준 분이다. 이 분이 나의 마음을 되돌렸다. "2∼3년이면 재활 훈련하는 셈 치면 된다. 우리는 기다릴 테니 군대를 마치면 딴 생각 말고 곧바로 돌아오라"고 했다. 구단은 나를 끝까지 기다려줬다. -공백이 3년 정도 있었는데도 지난해 성적이 좋았다. ▲지난해 4월에야 플로리다 캠프에 합류했다. 이 곳에서 몸을 만들고 싱글A로 가려면 6개월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윌리스 코치가 한 달 만에 머틀비치(싱글A)로 보내줬다. 그리고 나를 곧바로 마무리로 기용했다. 기존 마무리를 하던 젊은 친구가 불평을 했지만 실력을 보여주자 상황이 달라졌다. 미국 친구들은 모를 땐 얕잡아 보다가도 잘만 하면 주위에 몰려들어 친한 척을 한다. -갑자기 공을 던졌는데 몸은 괜찮나. ▲기초체력부터 키워야 하는 게 정석이지만 캠프 합류 첫날부터 불펜 투구를 했다.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구단에선 무리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내가 고집을 부렸다. 아니나 다를까 몸이 아프기 시작하더라. 그래도 참고 던졌다. 1주일간 그렇게 하니까 2주를 쉴 수 밖에 없었다. 공을 안 던지다 풀시즌을 치러서인지 최근까지 허리가 안 좋았다. 얼마 전 올랜도에 있는 한의원에서 피를 뽑으니 검은 피가 폭포처럼 나오더라. 그래도 별 차도는 없었다. 그런데 친한 구단 트레이너에게 치료를 받자 3일 만에 말끔히 나았다. 원래 공 던지는 오른 팔에는 이상이 없었고, 허리까지 나아져 지금은 컨디션이 최고다. -군대 얘기 좀 해보자. 군대를 가게 된 계기가 불미스러웠는데. ▲사실 한국에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다. 유학비자로 좀 더 버틸 수 있었는데 당시 에이전트가 방법이 있으니 일단 귀국해서 신검을 받으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는 운동선수들의 병역비리 사건이 터진 시기였다. 결국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 체포돼 현역병으로 복무했다. 강원도 화천 7사단에서 소총수를 맡았다. 처음에는 대대장님이 배려해줘 PX병을 했다. 그런데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다. 매일 돈 계산을 하는데 '펑크'를 내야 하지 않으니 그게 더 힘들더라. 그래서 소총수를 자원했다. -대학 시절 병역혜택을 받을 기회도 있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운이 없었던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 대표팀에 뽑혔다. 그런데 호주에서 열리는 국제 대회를 앞두고 대학 동기들이 "도망가자"고 모의했다. 차마 빠질 수 없어 그렇게 했더니 불성실한 선수로 찍혔다. 그래서 대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그때 나 대신 뽑힌 선수가 정대현(SK)이다. 그 대회에서 잘한 정대현은 이듬해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도 선발됐고, 결국 면제 헤택을 받았다. -군대에서는 훈련을 아예 못한 건가.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운동할 여건도 안됐다. 다만 틈만 나면 돌을 집어서 던졌다. 그게 투구감각 익히는 데 도움이 됐는지는 모르지만 다시 야구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열심히 던졌다. 그게 다였다. 사실 입대 당시에는 "모든 게 끝났다"고 자포자기한 상태였지만 겪어보니 할 만했다. 군대를 갔다 와도 충분히 운동을 할 수 있다. 2년간 공백을 감수해야 하지만 제대 후에도 충분히 운동할 수 있다. -복귀해서 야구를 다시 시작하니 할 만하던가. ▲그렇다. 싱글A에서 시작해 더블A까지 올라갔는데, 더블A 수준까지는 충분히 통하더라. -올 시즌도 더블A에서 출발할 것 같은데. ▲일단 더블A 마무리로 낙점됐다. 지난 시즌이 끝나고 "나이도 찼고 가진 돈도 없다. 중간계투라도 좋으니 트리플A로 보내달라"고 했지만 윌리스 코치가 나를 설득했다. "더블A에서 출발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면 올 시즌 중반 곧바로 메이저리그로 승격시킨다"고 했다. 지난해처럼 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지만 구단은 트리플A를 건너 뛰게 할 계획이다. 올해 안에 빅리그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구단 내에서 정성기라는 이름이 꽤 알려져 있더라. ▲운이 좋았던 것 같다. 나를 지도해 본 머틀비치와 미시시피(더블A) 투수 코치들이 나에 관해서는 항상 좋은 내용을 윗선에 보고했다. 윌리스 코치도 나를 지금까지 밀어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애틀랜타에서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우리 구단이 각 단계별로 마무리감이 부족하다. 애틀랜타도 확실한 마무리가 없다. 내가 잘만 하면 구단은 나를 장차 빅리그 구단의 마무리로 쓸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난해에 나름대로 잘 한데다 올해 40인 로스터에 진입하지 못하면 구단을 떠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구단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어떤 구단은 나를 선발투수 감으로 여기고 있다고도 들었다. -요즘 구속은 어느 정도 나오나. ▲지난해 초반에는 87∼88마일에 불과했다. 구속이 나올 리 없었다. 시즌 후반부터 92마일까지 찍고 있다. 올해 93마일(약 150km)까지 올리고 싶다. 포심패스트볼에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을 구사한다. -애리조나폴리그(AFL)에서는 잘 던지다 막판에 성적이 좋지 않았다. ▲구단은 도미니카나 콜롬비아 윈터리그를 추천했다. 그런데 콜롬비아는 범죄가 많다고 들어서 가기가 꺼려졌다. 나는 풀시즌을 치르고 완전히 녹초가 되서 그저 한국에 가서 쉬고 싶었다. 그때 윌리스 코치가 AFL에 가라고 했다. 유망주들이 대거 참가하니 거기서 잘 하면 돋보일 거라고 했다. 그래서 애리조나로 갔는데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마지막에는 던질 힘이 바닥났다. 구속이 87마일 밖에 나오지 않더라. -군 제대 후 한국 프로야구 진출 생각도 있었을 텐데. ▲솔직히 말해 국내 구단들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다. 내가 대학(동의대) 졸업할 때 서울의 한 구단에서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그런데 하는 말이 "너 지금 실력으로는 1억 원도 받기 힘들다. 우리가 1억 원 줄 테니 계약하자"며 자존심을 긁더라. 마침 2학년 때부터 애틀랜타에서 계약 제의가 있었던 터였다. 4학년이 되자 고위 스카우트가 한국에 찾아와 적극적으로 계약을 원했다. 그래서 미국에 진출하게 됐다. 제대 후에도 접촉해온 구단이 있었다. 고향팀이었다. 그런데 그곳 스카우트가 "너 갈 데도 없을 텐데 야구하고 싶으면 우리한테 와라. 받아줄게"라고 하더라. 그런 대우를 받고 가고 싶었겠나. KIA는 고교(순천 효천고) 3학년 때 내가 황금사자기 준우승까지 혼자 던졌어도 지명을 안 한 구단이다. -지금 메이저리그 구단에 낯익은 얼굴들이 있겠다 ▲제프 프랑코어와 브라이언 매켄이다. 2003년 우리 팀이 싱글A에서 우승할 때 동료였다. 거의 5년 만에 나를 보자 정말 반가워하더라. "그동안 보고 싶었다"며 환영해줬다. 당시 우리팀 멤버가 참 막강했다. 5선발까지 모두 메이저리그감이라고 평가받았다. 우승까지 차지한 동료였으니 반가움이 더한 것 같다. 2003년 당시 참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다. 틈만 나면 인근 애틀랜타로 같이 놀러다니기도 했다. 그때 멤버 가운데는 존 슈어홀츠 사장의 아들도 있었다. 조너선 슈어홀츠라는 친구다. 슈어홀츠 부부가 그래서 우리 팀 경기를 많이 보러 왔다. 덕분에 나도 눈에 띌 수 있었다. 조너선은 '빽'으로 트리플A까지 올라갔지만 결국 야구를 그만두고 지금은 출신 대학 코치를 하고 있다. -군대 갔다 오니 구단 사람들 반응은 어떤가. ▲군대에서 몇 명이나 죽였냐고 묻더라. 물론 농담이었지만. 미국은 군대를 가면 전쟁을 하지 않나. 한국 군대도 매일 전투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더라. -미국 생활이 꽤 힘들 텐데. ▲나는 미국이 체질에 맞는다. 일단 미국 음식을 좋아한다. 아주 가끔 한국 식당을 찾기도 하지만 미국 음식만 먹어도 충분하다. 지난해 뛰었던 미시시피는 원래 인종차별이 심한 동네였는데, 최근에는 외지에서 이사온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그런 분위기가 사라졌다. 내가 살던 동네에는 한국 사람이 없지만 구단 연고지가 미시시피 주도인 잭슨과 가깝다. 그곳에는 한국 사람과 상점이 꽤 있다. -힘든 시기를 버틴 원동력은. ▲나를 지탱해준 것은 내 약혼자다. 군대 입대 직전 아는 사람의 소개로 만났다. 내가 힘들어할 때마다 그녀는 용기를 북돋아줬다.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은 것은 약혼자 덕분이다. 제대 후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도 옆에서 계속 도와줬다. 그녀가 없었으면 지금까지 버티기 어려웠을 거다. -꿈을 꾸고 미국에 진출했으나 도중에 실패하고 귀국한 선수들은 미국 생활이 힘들다고 말한다. ▲실패했으니 그런 말을 하는 거다. '눈물젖은 햄버거'라는 말은 야구가 안 되니까 하는 소리다. 물론 나도 도중에 포기했다면 같은 말을 했겠지만. 사실 미국 야구가 힘든 것은 맞다. 한국에서 야구하면 훨씬 편하다. 하지만 나는 10시간이 걸리는 버스 이동도 재미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재미있다. 한국어를 쓸 기회가 적다 보니 영어를 주로 쓰게 되고 영어 실력도 많이 늘었다. 결국 본인의 의지에 달린 일이다. workhors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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