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만 아시는 분인데 얼마나 답답하시겠어요". 지난 19일 잠실 두산전에 앞서 SK의 한 선수가 김성근(66) 감독에 대해 한숨을 내쉬었다. 김성근 감독은 이날 경기에 앞서 가진 '윤길현 사태' 관련 긴급 기자회견에서 "불미스런 일이 생겨 안타깝다"면서 "오늘 경기는 결장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여기에 "감독으로서 선수들의 교육 부족이 마음에 걸린다. 나아가 우리 야구팬들의 성원과 야구붐이 다시 일어나고 있는 중에 물을 뿌린 격이 된 것 같다. 현장 최고 책임자로서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하나의 태도 표시를 해야 되지 않나 생각했다"고 설명까지 붙였다. 김 감독은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속에서 허리를 굽혀 짧은 순간 강한 '예(禮)'를 갖췄다. 이를 통해 팽팽하던 SK와 KIA 사이에 흐르던 냉기류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지만 조금씩 온기류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어떤 식으로 가야 하나" "어떻게 그런 욕을 한 선수를 다시 마운드에 세울 수 있나". 일부 KIA 팬들은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윤길현을 다시 마운드에 올렸다고 추측, 김 감독을 비난했다. "그날 자세한 것은 몰랐다". 김 감독은 지난 15일 문학구장에서 윤길현 사건이 발생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자신과 윤길현을 비방하는 플래카드까지 등장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확실히 깨달았다. 어떻게 풀어야 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몰랐던 까닭에 KIA팬 대표까지 만날 작정이었다. 윤길현이 최경환을 삼진으로 낚은 후 뭔가 강한 액션을 취한 것은 알았다. 하지만 윤길현의 욕설이 초고속 카메라에 잡혀 시청자들에게 연신 리플레이되고 있었는지, 덕아웃에서 욕설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장면이 화면에 나왔는지 전혀 몰랐다. 이에 야구관계자들은 김 감독이 몰랐을 것이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경기가 시작되면 일단 김 감독 주변에는 선수는 물론 코치들도 범접하지 못할 것이다. 그 만큼 김 감독은 철저하게 고독을 즐기는 스타일이다. 지시할 사항이 있을 때 코치에게 한 두마디 할 뿐이다. 윤길현이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 하더라도 감히 경기 중 김 감독에게 다가가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김 감독 스스로 올 시즌 초반 털어놓은 자신만의 리더관을 통해 설명된다. "리더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끝이다. 신비스러운 면이 있어야 한다. 고독해야 한다. 나는 혼자 밥을 먹는다. 선수들이나 코치들과 함께 먹지 않는다. 코치들과 가끔 마시는 술도 일 대 일로는 마시지 않는다. 외롭지만 그러기 위해 노력했다. 이기든 지든 실수를 하든 모든 책임은 리더가 진다. 그 책임을 아래로 내려서는 안된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라인을 그어뒀다. 내가 들어가지도 않고 들어오게 하지도 않는 라인이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날 "작년에 비해 선수들에게 내는 사인이 급격히 줄었다. 지금 SK 야구는 김 감독이 하나하나 지시하는 야구가 아니다. 큰 맥락만 짚을 뿐 나머지는 코치, 선수들이 알아서 하는 체제"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이에 대해서도 시즌 초반 설명한 적이 있다. "지금의 SK는 작년보다 한 단계 더 올라섰다. 이제 그 속의 일원으로서 내가 빠져 나온다 해도 그 체제는 변함이 없어졌다". 한마디로 김 감독이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코치들과 선수들이 그 스타일을 몸에 체득했다는 뜻이다. 이날 SK 선수들은 몸과 마음은 '필승'을 외쳤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충격까지 뛰어넘을 수 없었던 정신력은 여전히 사령탑의 존재감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야" "상대에게 예의를 갖춘 조영민을 2군으로 내려 보낸 감독 아닌가". 지난 4월 12일 목동 우리 히어로즈전에서 조영민은 무려 120개의 공을 던진 후 다음날 2군으로 떨어졌다. 15안타를 맞았고 9실점했다. 가장 큰 이유는 광주일고 선배 정성훈을 공으로 맞춘 후 엉덩이를 토닥였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경기장에서는 적인데 아무리 선배라도 취해서는 안될 태도"라며 노기를 드러냈다. "좋은 지도자는 선수에 따른 다양한 프로세서를 지니고 있다". 김 감독은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는 선수마다 제각기 다뤄야 하는 방법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는 인스트럭터 생활을 하면서 쌓은 귀중한 경험 중에 하나다. SK 투수 김광현은 김 감독의 작년과 올해를 비교하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가만히 보면 감독님이 선수들을 상대로 하는 태도나 말에는 분명 의도가 숨어 있다. 올해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도 작년에 감독님의 의도대로 당한 느낌이다. 계속 일은 꼬여가는데 표정은 담담하셨다. 다른 선수에게는 가끔씩 조언을 해주셨다. 그러나 내게는 그러지 않았다. 그게 나를 더 조바심나게 만들었고 계속 감독님을 찾게 됐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고 나를 고쳐가기 시작했다". 조영민도 비슷한 입장이다. "당시(히어로즈전 후)에는 솔직히 '이제 김 감독님 밑에서는 야구하기 글렀구나' 생각했다. 기사를 통하기 전까지는 내가 2군으로 내려간 이유가 다른 것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마운드에서 너무 생각이 많았고 집중하지 못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다시 나를 1군에 올렸다. 당연히 꾸중을 들을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도 아무 말씀 안하신다. 이후부터는 마운드에서 오직 무실점하겠다는 생각만 난다. 다른 잡생각을 할 틈이 없다. 그렇지 않고 실점하면 바로 2군으로 내려가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최근 김 감독은 LG에서 방출된 신윤호의 투구폼을 고치기 위해 '빗자루'를 이용했다. 배구 서브를 넣거나 배드민턴을 친다는 기분으로 던지라는 설명을 하기 위해서다. 전병두에게는 팔의 스윙 궤적을 높이기 위해 '빌딩에서 공을 던진다'는 생각으로 던져라고 주문했다. 김준에게는 양팔을 동시에 원을 그리게 하며 피칭하게 했다. 데이터를 철저하게 따라 정형화된 사고를 가졌을 것 같은 김 감독이지만 각 선수마다 '깨우침'의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때때로 기자들도 모르는 사이 선수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셈이다. "나 짤리면 끝이잖아" "일방적인 흐름에서는 적당히 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소위 말해 일찌감치 승부가 끝난 경기에서는 적당히 해야 상대도 덜 속상하다. 김 감독은 긴급 기자회견에서 "작년 코나미컵에서 주니치에 패한 후 선수들의 몸과 마음의 모든 면을 올해 코나미컵으로 가는데 초점을 맞추고 강화했다"고 밝혔다. 야구선수들이 기피 대상 1호는 바로 '부상'일 것이다. 그러나 SK 선수들에게는 부상은 당연한 것이고 정작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은 '자신의 부상을 털어놓는 것'이다. 지난 14일 KIA전 1회 도중 채병룡은 갑작스런 오른 어깨 통증을 호소, 2군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채병룡은 이미 그 전 경기에서 약간의 어깨결림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주환은 지난 4월 19일 잠실 두산전에서 무릎을 다쳐 전치 3주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걸을만 하자 곧바로 타격 연습에 나섰다. "야수는 뭐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경기에 나가야 된다. 특히 SK에서는 가만 있다가는 영영 못나갈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매일 트레이너 코치를 붙들고 연신 맛사지에 나섰다. 그리고 1주일도 안돼 정상으로 돌아갔다. SK의 한 코치는 "감독님은 선수가 아프다고 하면 무조건 쉬게 한다"며 "일단 아프다는 인식을 하면 완전하게 나을 때까지 경기에 내보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김 감독은 "극한 상황을 돌파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선수들 스스로 절박함을 느껴야 한다. 안주하면 안된다"며 "야구에서 리더의 목적은 이기는 것이다. 목표 달성을 못하면 당연히 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30일 목동 히어로즈전에 앞서 롯데 로이스터 감독은 "우리(롯데)는 이기기 위해 왔다. 지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오늘도 이기기 위한 경기를 할 것"이라고 딱잘라 말했다. 당시 히어로즈가 홈 13연패로 자칫 1987년 청보 핀토스가 세웠던 홈 14연패 기록과 타이를 이룰 수 있는 순간이었다. 로이스터 감독은 메이저리거 출신답게 철저한 프로페셔널의 개념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김 감독도 마찬가지.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베스트로 경기하는 것이 정상이라 생각한다"며 "크게 이기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갖춰서 하면 문제겠지만 상대를 깔본다는 것은 내 양심을 걸고 아니다"고 못박았다. 기존의 경기 스타일을 고수할 것이며 바꿀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매 타석, 매 투구가 마지막일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가득찬 SK 선수들로서는 '적당한' 단어가 사치일 수 밖에 없다. 김 감독 역시 "나 짤리면 어쩌라구"라는 말을 농담처럼 자주하면서 절박한 심정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다. 이렇듯 누가 뭐라든 모든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야구 철학을 지켜온 김 감독이다. 선수들 한 명 한 명이 다 그 결실의 산물들이다. 그 중 계속 자라나던 윤길현이라는 열매가 저지른 실수를 알게 됐다. 결국 김 감독은 현재 쥐고 있는 신념보다 미래에 있을 더 많은 영광들을 위해 허리를 숙인 것이다. letmeout@osen.co.kr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