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쟁이엔 팩트 중심의 단문이 생명"-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
OSEN 강희수 기자
발행 2010.08.16 16: 22

[피플] ‘김대중 자서전’ 집필자 김택근 위원
-2004년전엔 김 전 대통령 만나본 적 없어
-2006년 7월부터 41차례 녹취 6년간 집필

-한국 현대사 관통하는 DJ인생 읽어봤으면…
[이브닝신문/OSEN=김미경 기자] 41차례의 녹취기록, 200자 원고지로 치면 5600장 분량, 만 6년간의 집필과정, 총 2권, 1356쪽. 그 분량도 엄청나다. 지난달 29일 출간된 ‘김대중 자서전’ 얘기다. 이 책에는 김 전 대통령의 85년 삶이 오롯이 담겨있다. 김택근 경향신문 논설위원(56)이 직접 대필했다. 제대로 된 정본 자서전으론 처음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그를 선택한 것은 의외였다. 그는 김 전 대통령과 단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다. 존경하던 인물이지만 그게 다였다. 2004년 4월 자서전 쓰는 일을 부탁받으면서 첫 인연을 맺었다. 김 전 대통령은 왜 그를 ‘대필 작가’로 선택했던 것일까.
 
▲기자 대신 대필 작가
김대중 자서전이 출간된 직후. 김택근 논설위원에게는 ‘기자’라는 타이틀 대신 ‘대필 작가’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1983년 현대문학의 고 박두진 시인의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한 그였다.
셰도우 라이터(shadow writer). 우리말로 직역하면 그림자 작가 또는 유령 작가 정도다. 주로 기업인, 유명인사 등의 회고록이나 연예인들의 자서전·에세이 정도를 대신 써주는 사람이다. 영미권 출판계는 공저자라는 이름으로 책 표지에도 이름이 올라가곤 하는 그들과 달리 한국 출판계에서는 대필을 여전히 ‘절대로 존재를 밝혀서는 안 되는 터부’로 인식된다. 당연히 그들의 이름은 판권에서조차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내가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인연의 시작
“지난 2004년 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인 김한정, 최경환 비서관이 ‘대통령께서 한 번 뵙고 싶어 한다’며 찾아왔다. 대통령의 뜻이라면서 자서전 얘기를 꺼냈을 땐 깜짝 놀랐다. 김 전 대통령이 내 글을 챙겨 읽고 있었다는 얘긴데,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내 글에서 진심을 읽었던 것 같다. 문화부 소속기자였던 내게 대필 일을 맡긴 이유도 객관성 확보때문이라는 것을 그후에야 알았다. 그 뒤 김 전 대통령을 만났고 모든 게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에 따르면 당시 김 전 대통령의 상황은 개인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때였다. 퇴임 뒤 분당 등으로 그는 권력의 끈을 놓은 상태였고 몸도 예전같지 않았다.
“절망에 빠져 있을 법도한 데 첫 만남에서 대통령은 ‘희망’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한류에 대한 얘기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는 대인배였다. 안심이 됐다. 그의 삶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민족 역사와 평화의 대통령으로 후손들에게 재평가돼야 한다는 다짐도 앞섰다.”
김택근 논설위원과 김 전 대통령의 자서전 작업은 그렇게 시작됐다.
 
▲간결, 개성 있는 문체
대필 작가는 기본적으로 ‘글발’이 있어야 한다.
간결하면서도 유려한 그의 문체는 기자들 사이에서도 꽤 유명하다. 1995년 당시 막 태동하던 ‘X세대’라는 용어와 신문 지면에 섹션 개념의 발상을 삽입한 것도 ‘매거진 엑스(X)’를 기획했던 그의 팀 아이디어였다.
“그해 처음엔 신문 같지 않은 신문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새로운 신문을 한눈에 알아보고 반겨줬다. 안주하지 않기 위해 변화는 필수였다. 곧바로 다른 신문들의 벤치마킹 모델이 됐다. 기존 기사체(만연체)에 불과했던 글들도 개성 있는 문체로 바뀌었다. 자그마한 전기가 된 셈이다. 글쟁이들은 단문을 쓰는 게 중요하다. 단문을 쓰려면 충분한 취재가 우선되어야 하고 팩트(사실)가 있어야 한다.”
그의 그런 글은 DJ를 묘사해 내기에 적격이었다.
 
▲85년의 생애…방대한 기록의 결과물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41차례에 걸쳐 김 전 대통령의 구술을 녹취했고 이를 정리하니 200자 원고지 5600장 분량에 달했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글도 빠짐없이 읽어야 했다. 국정기록과 메모광인 그의 수첩들까지 모조리 정리해야만 했다.
당초 그는 집권 전까지를 다룬 1부 집필만을 맡았었다. 1부를 끝내고 쉬고 있을 때 김 전 대통령은 갑자기 그를 불러 ‘자서전 편집위원’ 임명장과 만년필을 주며 “마무리 하라”고 했다. 임종 직전인 지난해 7월이었다. 그는 내리 2부 집필까지 도맡았다.
“중간 중간 자책도 많이 했다. 한 시대의 인물을 제대로 써 내려가고 있는 건지 헷갈렸다. 그때마다 김 전 대통령은 새로운 영감을 주고 인내하는 법을 깨우쳐 줬다. 자서전이 마무리된 지금은 한편으로 많이 두렵기도 하다. 사람들이 이 자서전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 김 전 대통령은 만족할는지. 크고 깊은 그의 생애가 이 책에 오롯이 살아남아 있길 바랄 뿐이다. 반면 민주주의 귀중한 유산인 그의 생애를 정리한 데 대한 보람도 크다.”
 
▲생(生), 날것 그대로의 서술
그가 글을 쓸 때 가장 염두해 두는 부분은 바로 원석을 발견할 줄 아는 눈을 기르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의 눈으로 보되 자연은 자연의 눈으로 바라볼 때 가장 진실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 실체를 생각 그대로 서술하는 데서부터 그의 글 쓰기는 시작되는 셈이다. 그가 계획 중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전도 그렇다. 김 전 대통령이 마지막 투병 이후 서거할 때까지의 70여일을 담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김 논설위원은 자서전에는 담을 수 없었던 얘기를 한 권의 책에 담아볼 생각이다.
에세이집을 준비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요즘 뜨고 있는 트위터도 해야겠고. 천천히 하나씩 시작할 생각이다.”
그에게 바람 하나가 생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인생을 담은 이 책자를 통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민주주의 역사는 물론 평화의 삶을 ‘독자들이 직접 구매하길 바란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그 덕분일까. 김대중 자서전의 인기가 예사롭지 않다.
 
kmk@ieve.kr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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