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은퇴' 이도형, "제2의 인생 준비하고 있었다"
OSEN 이상학 기자
발행 2011.01.19 07: 54

"이도형 선수, 아니신가요. 사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매서운 한파가 덮친 지난 18일 대전 모 커피숍. 한 팬이 다가와 그에게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그는 묵묵히 사인을 했다. 이름 위에는 'EAGLES'라고 새겨적었다. 사인을 다한 그는 "아차, 이제 이건 적으면 안 되는데"라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얼마 전 은퇴를 결정한 한화 포수 이도형(36). FA 계약을 맺지 못한 그는 어쩔 수 없이 정든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공익근무 중인 후배 김태완은 "최소 2년은 더 하실 수 있는데 아쉽다. 우리 지명타자는 어떡하나"라며 안타까워 했다. 한화를 떠났지만 여전히 그는 후배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텁다. 이날도 공익근무 중인 김태완을 불러내 저녁을 사줬다. 모순투성이 FA 제도의 희생양이 됐지만, 그는 묵묵히 그리고 힘차게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 1993년 OB에서 데뷔한 이후 18년 프로선수 생활을 마감한 이도형을 만나 그의 지난날 야구인생과 제2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잠실 홈런왕
- 언제 왜 야구를 시작하게 됐나
학동초등학교 5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어린 마음에 야구 유니폼이 너무 멋있어 보였다. 부모님께서 반대하셨는데 끝까지 우겨서 야구를 시작했다. 코치 선생님도 운동에 소질이 있는 것 같다며 권유했다. 그때 같이 야구를 한 친구가 지금 농구선수로 뛰는 서장훈과 LG에서 투수로 활약했던 전승남이다.
- 어떻게 포수 포지션을 맡게 됐나
 
다들 포수를 하기 싫어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장비도 많고, 사인을 내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 없었다. 물론 그때는 이렇게 힘든 포지션인지 전혀 몰랐다.
- 어린 시절 롤모델이 누구였는지 궁금하다
장종훈 한화 타격코치님이다. 어린 마음에 홈런을 펑펑 치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실제로 한 팀에서 생활했다.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연습을 정말 열심히 하는 분이셨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존경스런 분이다.
- 휘문고를 졸업하고 바로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흔치 않은 길이었는데
처음에는 대학으로 진학할 계획이었다. 그때 당시에는 고졸 선수가 바로 프로에 뛰어들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도 처음에는 대학에 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OB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프로에서 뛰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렸다. 중·고교 시절 연습을 마치면 항상 잠실구장으로 갔다. 훈련을 끝내고 가면 7~8회쯤이 되는데 당시에는 경기 후반 무료입장이 가능했다. 늘 동경하던 잠실구장에서 하루빨리 팬들이 보는 앞에서 직접 경기를 뛰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버지와 몰래 OB와 계약을 했다.
- 그래서 잠실구장을 밟아 보니 기분이 어땠는가
 
잠실구장은 무슨. 나는 프로에 입단하면 누구나 잠실구장에서 바로 뛸 수 있는 줄로만 알았다. 2군 같은 것은 있는지도 몰랐다. 잠실구장 대신 2군이 있는 경기도 이천에만 머물렀다. 2군과 같은 게 있는 줄 알았으면 프로에 직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 어리고 철없을 때였다. 입단 첫 해 2군에만 머무르고 1군에 뛰지 못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면서 어린 나이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학에 들어간 동기들이 프로에 들어올 때까지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보겠다고 마음 먹고 독기를 품었다.
- 2년차 때부터 점차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군 데뷔 첫 경기가 잠실 LG전이었는데 첫 타석에서 안타를 쳤다. 그리고 바로 다음 타석에서 차동철 선배에게 홈런을 쳤다. 우중간으로 넘어가는 홈런이었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잠실구장에서 밀어서 우중간을 넘기는 홈런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씩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윤동균 감독님이 OB에 있었는데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줬다. 어느날에는 예고없이 4번 지명타자로 기용되기도 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고졸 2년차 선수를 4번타자에 넣는 건 대단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 3년차가 된 1995년에 화려하게 빛을 발했다. 특히 홈런 14개 중 12개를 잠실구장에서 터뜨리며 '잠실 홈런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운이 좋았다. 당시 포수로는 김태형 선배와 박현영 선배가 있었다. 그러나 두 선배 모두 부상으로 고생하면서 3번째 포수였던 내게 기회가 왔다. 주전 마스크를 쓰자마자 팀이 운좋게 9연승을 달리면서 나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멋 모르고 하던 시절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잠실구장에서 홈런을 많이 쳤다. 팀 성적도 좋았고 야구 인기도 최고일 때였다. 야구가 정말 재미있었고 실력이 많이 늘었던 시기였다. 주축 멤버로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했는데 정말 기뻤다. 그때가 참 많이 생각나고 그립다.
 
▲ 군대 그리고 트레이드
- 그러나 1996년에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1996년 개막전에서 주전 포수 마스크를 썼다. 1995년 활약으로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군대가 발목을 잡았다. 당시 병역비리 파문 때문에 입대를 연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갑작스레 영장이 나오면서 입대 연기를 위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허리도 조금 안 좋았지만, 군 문제로 더 정신이 없었다. 결국 1997년에 현역으로 군입대했다. 당시에는 현역으로 입대하는 것이 흔치 않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창 야구를 하고 실력을 기를 시간을 허비했다. 돌이켜 보면 참 아쉬운 부분이다.
- 군복무를 마치고 2000년 돌아왔다. 그러나 팀명은 OB에서 두산으로 바뀌었고, 포수 자리에는 홍성흔이라는 후배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포수 자리도 없었지만 나부터 몸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상태였다. 군복무 기간 2년과 그 이전 1년까지 약 3년간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못했다. 공백기가 길었던 탓에 체력도 되지 않았고 경기감각도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걸 회복하는 데에만 거의 2년이 걸렸다.
-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한화로 트레이드됐다. 일찌감치 트레이드를 요청했던 것으로 안다
그렇다.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지만 1995년처럼 기쁜 마음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름 우승 멤버였지만 2001년에는 팀에서 비중이 적었다. 포수 자리도 없었던 탓에 군복무를 마친 뒤 2년 정도 줄기차게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구했다. 그때마다 구단에서 반대했고 김인식 감독님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승 후에 다시 한 번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김인식 감독님께서 "정말 가고 싶다면 보내줄게"라고 말씀하셨다. 며칠 후 강인권과 트레이드돼 한화로 이적했다. 출장기회 때문에 이적했지만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두산을 떠나 마음이 좋지만은 않았다.
- 한화 이적 후 2년 연속 16홈런을 터뜨리는 등 공격형 포수로 이름값을 했다.
사실 트레이드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트레이드되기 전에 김인식 감독님께서 "네가 다른 팀에 가서 자리를 잡지 못하면 일찍 은퇴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셨다. 이적 후에 자리를 잡지 못하면 더 힘들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안주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 한화에서 자리를 잘 잡았고 나름대로 좋은 활약을 펼쳤다고 생각한다.
- 한화에 온 뒤로 처가가 있는 청주경기에서 펄펄 날아다녔다. 2002년 이적 후 청주경기 통산 타율 3할2푼 12홈런 35타점에 장타율은 무려 6할5리였다. 청주에서는 배리 본즈가 부럽지 않았다. 또한, 장모께서 청주경기 때마다 구단에 피자와 수박을 돌린 것으로도 유명했다. 청주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듯하다
주위에서 청주에만 오면 잘한다고 말해주셔서 오히려 더 잘됐다. 청주에 오면 나 스스로도 '청주니까 잘 되겠지'라면서 편하게 마음먹었다. 처가가 되기 전부터 청주는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이었다. 휘문중 1학년 때 처음으로 성인규격 야구장에서 홈런을 때렸는데 그곳이 바로 청주구장이었다. 그때부터 청주와는 인연이 있었다. 청주구장이 작기 때문에 나처럼 힘이 좋은 타자들은 뜬공이 될 것이 홈런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처가가 된 이후 처음에는 가족들이 단체로 경기를 보러 와 부담이 많이 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부담보다는 편안함이 들었다.
- 2004년 5월26일 문학 SK전에서 어깨 부상을 당한 후 포수 마스크를 벗고 지명타자로 뛰어야 했다
2루로 슬라이딩하다 어깨를 다쳤다. 다친 당일에는 큰 부상이 아닌 줄 알았는데 다음날 팔이 올라가지 않고 수저를 들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그 이후 어쩔 수 없이 포수를 그만둬야 했다. 어릴 때부터 해오던 포수였는데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방망이라도 잘 쳐야 했다. 포수에 대한 미련을 접고 지명타자로 방망이에 전념했다.
- 2005년에 김인식 감독이 한화에 부임했다. 2005년 22홈런으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하더니 2006년에도 19홈런을 때려냈다. 스승의 믿음에 제대로 보답했는데
 
김인식 감독님께서 오시자마자 내게 주장을 맡겼다. OB 시절부터 함께 한 코칭스태프 분들도 있었고, 많이 믿어주셨다. 2년간 주장을 하면서 코칭스태프와 의사소통이 잘 이뤄졌다. 그때 개인 성적이나 팀 성적 모두 좋았다. 지금 돌아보면 주장 역할을 잘했던 것 같다.
- 그러나 2007~2008년 부진을 면치 못했고, 선수생활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2007년부터 다시 포수 마스크를 썼다. 어깨 통증도 많이 사라졌고, 포수로 다시 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그러나 슬럼프에 빠지면서 포수는 물론 지명타자로도 좋지 못한 성적을 냈다. 심리적으로 많이 쫓겼다. 2년간 부진하면서 나 스스로도 입지에 불안함을 느꼈다. 
 
▲ 부활의 깨달음
- 2009년 타율 3할1푼8리 12홈런 56타점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그것도 포수로 50경기를 뛰며 거둔 값진 성적이었다. 특히 7월4일 대전 KIA전에서 팀의 12연패를 끊는 끝내기 투런 홈런을 터뜨렸고, 정민철 코치의 은퇴식이 있었던 9월12일 대전 히어로즈전에서도 9점차 뒤집기의 종지부를 찍는 끝내기 스리런 홈런까지 드라마 같은 장면이 많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나
2009년 스프링캠프 때부터 타격감이 정말 좋았다. 선수생활 동안 느껴보지 못한 최고의 타격감각이었다. 그런데 2009년 개막 연전을 치른 뒤 선발투수들을 위해 1군 엔트리에서 빠졌다. 그런데 코치님께서 부르시더니 "2군에서 선수들을 잘 이끌어봐라. 지도자 연습한다고 생각하라"고 말씀하셨다. 은퇴를 준비하라는 뜻이었는데 타격감이 너무 좋아 선수생활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1군에 올라온 뒤 맹타를 쳤다. 계속 잘 치니까 코칭스태프에서도 믿어주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12연패를 끊었던 끝내기 홈런과 (정)민철이형 은퇴식 날 끝내기 홈런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특히 평소 민철이형을 좋아하고 따르는데 마지막 은퇴식에서 멋지게 승리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2009년 한해 동안 이런저런 과정을 겪으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배우고 느꼈는가
2009년에 부활할 수 있었던 건 심리적인 요인이었다. 기술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이 더 컸다. '올해가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이 드니 오히려 후회없는 스윙이 나왔다. 심리적으로 안정되자 여유가 생겼고 타석에서도 침착해졌다. 머릿속으로도 상대 패턴과 볼배합에 대한 파악도 잘 이뤄졌다. 욕심내지 않고 가볍게 밀어치니까 좋은 결과가 나왔다. 나름대로 타격에 대한 이론을 정립됐고 나 자신에 대한 분석이 완료됐다. '바로 이거구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몸으로 흡수하고 받아들이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 그런 기분이었다. 또 포수를 하다 보니 감각적으로 좋아졌고, 타격에 대한 스트레스도 덜했다. 타격에서 실수한 것을 수비에 집중하면서 잊어버렸다. 지명타자는 체력적으로는 여유있을지 모르지만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더 크다. 다른 선수들은 수비에 집중하느라 타격에서 실패한 기억을 빨리 떨쳐버리는데 지명타자는 그렇지 않다. 야구란 게 심리적인 요인이 이렇게 크다.
- 2010년 시즌 초반에도 타격감이 참 좋아보였다
2010년에도 자신이 있었다. 스스로도 기대를 많이 가졌다. 완벽히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였고 확신을 갖고 있었다. 시즌 초반에는 생각보다 기회가 많지 않아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하지만 조금씩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4월 한 달간 스트레스가 많았지만, 시즌 전에 스스로 생각했던 위치까지 어렵게 올라갔다. 그렇게 어렵사리 꿰찬 자리였는데….
- 2010년 5월1일 대전 삼성전에서 1루수로 나왔다가 왼쪽 팔 골절 부상을 당했다. 한 번에 시즌 아웃이 되는 큰 부상이었다
정말 너무나도 속상했다. 포수를 보다 다친 것도 아니고 타자로 나와 사구를 맞은 것도 아니었다. 엄하게 1루수로 나갔다가 그렇게 다쳐버렸다. 당시 조동찬이 번트를 대고 1루로 달려오다가 충돌했는데 차에 부딪친 느낌이었다. 정말 너무 아팠다.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뒤 의사가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만 5개월이 걸린다"고 말했다. 너무 속상해서 몇달 동안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디 하소연할 데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답답한 마음뿐이었다. 구단은 필요할 때는 그렇게 써놓고, 필요가 없으니 그냥 버린다. 선수가 무슨 소모품도 아니고….
- 선수생활 동안 예기치 못한 부상 불운이 많았다. 자기관리 실패에 따른 부상도 아니고, 모두 경기 중 발생한 불의의 부상이었다
안 다치는 기술이 필요한 것이다. 부상도 결국 실력이다. 스스로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 몇몇 스타급 선수들을 보면 팬들에게 '설렁설렁한다'는 지적을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런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 개인도 팀도 손해가 크다. 사실 '최선을 다한다'는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내가 부상을 당한 것도 그런 기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마지막 부상을 당했을 때에도 투수 호세 카페얀의 송구가 완전 빗나간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뒤에 백업도 없는데 내가 그 공을 그냥 흘려보낼 수 없었다. 팀도 하위권이었고, 고참으로서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공을 향해 몸을 던졌는데 그렇게 큰 부상이 될 줄 몰랐다. 속상했지만 열심히 재활하며 준비를 했는데 이제 의미가 없어졌다. 2~3년 더 선수생활을 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 10~20년을 생각하면 하루빨리 새출발하는 것이 오히려 득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시즌 종료 후 FA 신청을 했는데 모두가 의외라는 평가였다. 어떤 이유에서 FA를 선언했는가
사실 순리대로라면 2009년을 마치고 FA를 신청하는 게 맞다. 그러나 그때는 2010년에 더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그때는 부상을 생각하지 못했다. 시즌 후 FA를 신청한 것에 대해 많이들 물어보신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나이도 점점 먹어가는데 언제까지나 FA를 미룰 수도 없는 일이었다. 팀도 나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방출을 안 한 것 아니었겠나. 그러나 FA를 선언한 뒤 분위기가 달라졌다. 우선 협상기간에 구단으로부터 "계약할 생각이 없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협상다운 협상도 없었다. 계약 마감 전날 다시 한 번 만나 구단 직원을 제의한 것이 전부였다. 어차피 FA를 신청할 때부터 계약을 하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빨리 새롭게 출발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야구에 대한 미련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크게 아쉬운 마음은 없다. 그러나 FA 제도에 대한 문제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이렇게 은퇴하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라도 FA 제도의 잘못된 부분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 이번에 제도가 부분 수정됐는데, 그 정도로는 지금과 큰 차이가 없다. 근본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 제2의 인생
- 은퇴 후 개인사업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무살 때 인터뷰를 보면 은퇴 후 희망이 스포츠 사업가였다
어릴 때부터 은퇴 후 스포츠 사업가가 되고 싶었다. 지금 인천에 사회인 야구선수들을 위해 야구장을 짓고 있다. 어릴 때부터 야구를 위한 일을 하고 싶었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2007~2008년 부진할 때 선수생활에 위기를 느꼈고 조금씩 미래에 대한 생각을 했다. 은퇴 이후 막연하게 지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선수들은 은퇴 준비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오로지 야구만 하느라 학창 시절 소풍과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다. 그래서 낯선 사회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은퇴 뒤 주어질 코치 자리도 준비가 없으면 안 된다. 코치는 성공에 성공을 거듭하신 분들께서 하는 전문적인 분야다. 코치들에 대한 처우 개선도 이뤄져야 한다. 코치 분들은 경쟁의 바늘구멍을 뚫은 전문가들인데 그에 걸맞는 대우가 아직 많이 부족하다.
- 추진하고 있는 사업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인천에 사회인 야구선수들을 위해 야구장을 짓고 있다. 거창한 구장을 짓는 게 아니다. 사회인 야구선수들이 정말 열악한 환경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그냥 맨바닥에 베이스만 놓고 야구를 한다. 그런 분들을 위해 덕아웃을 만들고 펜스를 설치해서 더 즐겁게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사회인 선수들을 위한 코치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사회인야구가 대단히 활성화되어 있고 수준도 훌륭하다.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인 리그도 일본에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인 선수들의 열정은 프로야구 선수 출신인 나조차도 반성하게 될 정도로 대단하다. 요즘 날씨가 정말 추운데도 밖에 나와서 야구를 한다. 나는 단지 그분들보다 야구를 조금 더 아는 것에 불과하다. 그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
- 구단에서 제안한 원정기록원을 고사했는데 코치에 대한 생각은 없나
코치에 대한 생각도 있다. 그러나 역시 준비가 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는 스포츠심리에 관심이 많다. 우리나라 선수들에게 심리 코칭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스포츠 환경을 보면 기술과 체력만을 강조한다. 심리에 대한 코치가 많이 부족하다. 내가 직접 선수로 뛰면서 필요성을 절감한 부분이다. 기회가 되면 이 분야에 대해 공부해서 심리 상담과 코치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단순히 체력과 기술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특히 야구는 정신적인 면이 크다. 똑같은 코치들한테 똑같은 훈련받는데 어떤 선수는 성장하고 어떤 선수는 도태된다. 그게 바로 정신적인 부분에서 오는 차이다. 전문상담가들이 있지만 선수로 뛰었던 사람이 전문적인 상담을 한다면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프로야구 통산 끝내기 홈런 1위(6개) 기록을 갖고 있다. 이것 또한 어떻게 보면 심리적인 측면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그런 기록은 몰랐다. 경험이 쌓이고 노림수가 생기면서 끝내기 홈런과 안타를 많이 쳤지만 심리적인 면도 컸다. 데뷔 초에는 끝내기 상황이 오면 긴장되고 떨려서 앞에 타자가 끝내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앞타자가 끝내지 않고 내게 찬스가 넘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크게는 이런 승부처부터 시작해 작은 부분에서도 심리적인 요소로 좌우될 때가 있다. 신인선수들이 처음 입단해서 대선배들과 캐치볼을 하면 손이 말려서 송구를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다. 신인선수 10명 중 2~3명은 그런 증상을 보인다. 잘 이겨내는 선수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는 선수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다. 그런 선수들에게 기술과 체력을 강조해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심리적으로 코치해 줄 수 있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나중에 꼭 하고 싶은 일이다.
- 18년간 프로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의 힘을 빼놓을 수 없다. 든든히 뒷바라지한 가족들에게 하고픈 말은 없는가
아내에게 너무 고맙다. 남편이 야구선수라 집을 비우는 날이 많은데 아이들을 거의 혼자 키우다시피했다. 언제나 너무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그동안 못했던 것을 앞으로는 잘하겠다. 아내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장모님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다.
- 18년 프로 생활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없나
 
감사한 마음이다. 한화를 많이 좋아해 줬고, 저도 많이 좋아해 줬다. 한때 슬럼프에 빠졌을 때에는 욕도 많이 먹고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안 좋은 글들을 보며 속도 상했다. 한동안 팬들을 멀리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경기를 지고 집에 돌아와서 TV로 녹화방송을 보는데 한 팬이 우리팀이 지니까 눈물을 흘리고 있더라. 그걸 보고 '아, 저렇게 우리팀을 응원하는 팬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그때부터 팬들에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선수들이 너무 승부에만 집착하고 있다. 프로야구의 진짜 주인은 팬들이 되어야 한다. 팬들께 보답을 해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에 아쉬움이 많다. 한화팬들도 그렇고 두산팬들도 예전을 기억하고 응원해주신 것에 대해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떻게든 표시를 해야 하는데 그런 자리를 마련하지 못한 게 조금 아쉽다.
waw@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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