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영, "연기할 땐 레드썬"[인터뷰]
OSEN 봉준영 기자
발행 2011.01.19 09: 14

배우 정진영이 치매에 걸린 뒷방 노인네가 돼서 돌아왔다. 올해 47살밖에 안된 팔팔한(?) 그가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허옇게 쉰 머리에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나타날 때, 김유신 장군이 늙으시면 꼭 그랬을 것만 같다. 할아버지가 된 그는 ‘분장의 힘인데...늙어 보인다면 다행이죠.’라는 말로 너털웃음을 지을 뿐이다.
2003년 영화 ‘황산벌’로 김유신 장군이란 옷을 입었던 배우 정진영은 8년 만에 다시 ‘늙은’ 김유신 장군이 됐다. 벌써 다섯 번째 함께 작품을 한, 동지라기보다 부부 같은(그의 말에 따르면 말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으로.
- 8년 만에 김유신 장군으로 돌아온 소감이 어떤가. 배우로 살면서 같은 역을 또 맡는 일은 흔치 않을 텐데.

▲ ‘황산벌’은 2003년 개봉 당시 기발한 코미디와 현실풍자로 기억되고 있는데, 후속편의 성격이니 그 지점에 또 도달할 수 있을까 (이준익)감독님과 고민이 많았다. 작품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다시 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사실 배우로서는 한번 했던 캐럭터를 두 번하는 것은 별로 재미가 없다. 분명 이번 김유신은 ‘황산벌’과는 다르다. ‘황산벌’이 김유신과 계백의 대립구도에 중심을 뒀다면, 이번에는 이야기 구도가 다르고 더 분산돼 중심이 여러 개다. 그러다 보니 예전처럼 카리스마를 부릴 필요가 없었다. 내가 가지고 갈 것은 일종의 사회자나 해설자 느낌이다.
- 아직 젊다면 젊은 나인데, 노인 연기라니... 힘들거나 속상하지는 않았나. 아직 호기를 부리는 장군이 어울린다.
▲ 콘셉트는 진짜 ‘노인’의 모습보다는 옛날 동화에 나오는 산신령 같은, 혹은 ‘반지의 제왕’ 속 할아버지의 느낌이었다. 연기톤도 진지한 것 보다 쉽게 풀어나가니 거기에서 발생하는 코미디가 있었다. 외적인 부분이야 미술팀이나 분장팀이 해주면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할아버지 외모를 갖추고 나면 나도 모르게 허리가 구부러지고, 목소리가 허스키해지더라. 오히려 편하고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 ‘황산벌’ 이후 출연한 사극에서 대부분 진중한 모습이었다. 다시 코믹 사극으로 돌아와 진중함을 벗으니 어떤가.
▲ 한 작품을 할 때는 부러 작품 하는 내내 그 인물이 돼서 살려고 한다. 그런 면에서 코미디 영화는 마음이 편해진다. 진지한 영화에 캐릭터까지 강하면 더 진중해진다. 그러나 코미디는 반대다. 작품을 하면 배우는 ‘레드썬’에 빠진다. 그 인물에 최면에 걸리는 것이다. 실제 모습도 밝아지고 웃으면서 살았던 시간이었다. 사실 우울한 영화를 하면 나도 우울해진다.
- 그러고 보니 ‘황산벌’과 ‘평양성’뿐만 아니라 영화 ‘왕의 남자’ 드라마 ‘바람의 나라’와 최근 ‘동이’에 이르기까지 사극을 정말 많이 했다.
▲ 내게 주어지는 역할 중에 사극 속의 인물이 극적인 것이 많다. 아무래도 현대극 보다는 스펙터클한 것 같다. 역사극이면 지금의 현실과는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큰 갈등이 있다. 사극에서 사람이 죽고 사는 경우는 흔하지 않나. 그런 매력이 있다.
한편으로는 가장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왕의 남자’인데, 그게 사극이었고 그 영향이 없지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극과 현대극 구분은 없다. 작품 속에서 극적이고 갈등이 큰 인물이 끌리고 재미있는 것일 뿐. 기회가 되면 오히려 현대극 쪽을 더 해보고 싶다.
- 이준익 감독의 페르소나란 말이 있다. 배우와 감독으로 만나 5작품을 함께 한다는 것은 보통 인연이 아니다.
▲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신뢰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인 친분과는 다른 것이다. 감독님이 ‘황산벌’로 실질적인 데뷔작을 하기 전에 제작자로 ‘달마야 놀자’ 때 만났는데 서로 진솔한 모습을 봤다. 그때부터 인간적 신뢰가 쌓였다. 물론 천년만년 계속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다음 작품도 꼭 하자며 압박은 없지만 기획단계에서 시나리오도 없는 않은 상태에서 얘기를 하다 나는 출연을 결심하고, 감독님은 나를 캐스팅한 후 시나리오를 쓴다. 그런식으로 작품을 계속하게 된다. 꼭 부부같다.
- 부부라면 부부싸움도 하나.
▲ 물론이다. 작품을 하다보면 당연히 의견차가 있고, 소리지르면서 싸우기도 하지만 극복 안한다. 서로 상처를 안받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둔다. 사실 남자 둘이 얼마나 곰살갑겠는가. 대면대면하다가 싸우기도 하고 하지만 초반에 그러면서 서로 오차조정을 하고 그 후로는 쿵짝이 딱 맞는다. 
- 이제 현장에서 거의 제일 위 선배일 텐데, 후배 배우들에게는 어떤 선배인가. 광수를 이준익 감독에게 소개해줬다는데 굉장히 자상하고 다정한 선배일꺼란 생각이 든다.
▲ 어느 작품을 할 때나 마찬가지겠지만, 선후배라는 선은 없다. 같은 작품을 하는 동시에 그들은 동지고 동료다. 그러다 보니 이래라 저래라 안한다. 그런 부분은 감독님과 배우가 일대일로 해결해나갈 일이다. 신인이든 후배든 아예 연기에 대한 멘트를 하지 않는다. 잘못 말하면 움츠려 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하게 기를 살려줄 뿐이다. 절대 그들에게 확정적인 조언을 주면 안된다. 그저 가능성을 알려주고 선택은 그 배우의 몫이다. 다만 나이가 많이 들수록 편하게 장난도 쳐주고 분위기를 풀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bongjy@osen.co.kr
<사진> 이대선 기자 sunda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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