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북 3형제 한의사 박수현 묘향산 한의원 원장
1993년 탈북…청진 의대 한의학과 중퇴
믿음 주고싶어 남들보다 더 열심히 공부

북한발 재스민 혁명? “제 경험상 힘들듯”
[이브닝신문/OSEN=김미경 기자] 한 편의 소설을 읽은 기분이다. 처했던 긴장의 순간들이 스쳐갔다. 대화 중 가끔씩 북한 특유의 센 말들이 튀어나왔다. 얘기는 청산유수여서 감칠맛이 날 정도였다. 탈북자 한의학박사 1호 박수현 묘향산한의원 원장(45)은 듣는 사람의 가슴을 두 근 반 세 근 반으로 만들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냈다. “국경을 어떻게 빠져나왔죠?” 뻔한 질문이었지만 가장 궁금했던 물음으로 인터뷰는 시작됐다. 스물여덟 살의 청년 박씨는 고향을 뒤로 하고 국경을 빠져나오는 데 딱 열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소설_국경이라는 터널
첩보영화보다 더 스릴 넘치고 허구보다 더 소섷 같은 얘기들이 이어졌다.
남한으로 오기까지 꼬박 열흘이 걸렸다는 그는 마치 일 년이 채 안된 얘기를 꺼내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중국에서 8일을 보낸 점을 감안하면 모든 일이 일사천리였다.
묘향산에서 8년간 군 생활을 마치고 1989년도에 청진의학대학 한의학과에 들어간 그는 1993년 10월 단짝 친구가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는데 중국어 통역을 해달라는 부탁받는다. 그 대가로 북한돈 3만원(당시 한화 약 3억원 정도)을 받기로 했다.
“중국에 가려면 국경을 넘어야 했지만 내 평생 손에 쥘 수 없을지도 모를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국경을 넘기로 했다. 10월1일 오후 8~10시 사이 두만강을 건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는 국경을 넘는 대신 군인들에게 수중에 있던 3만원을 탈탈 내줬더라. 중국에 가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믿었고 그곳엔 뭔가 다른 세상이 열릴 것만 같았다.”

▲기적_남한행 인연이 도왔다
백두산을 넘어 도착한 중국은 충격적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북한에서는 비싸서 타기 힘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시내 도로 곳곳에 가득했다. 북한에서 들어왔던 중국의 사정과 판이하게 달랐다. 28년간 배우고 알고 있던 것들이 산산조각 나는 느낌이었다.
“북한에서는 외국 사람들이 북한에 사는 것을 매우 부러워한다고 배운다. 하지만 친구 친척의 첫마디는 ‘김일성, 김정일 그 XX 때문에 북한이 못산다’는 말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김일성을 동네아저씨뻘처럼 부르는 말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이해 가지 않았지만 그는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한국에서 1년만 일하다오면 가족 전체가 평생 먹고 살만한 돈을 벌어올 거라고도 했다. 그는 친구와 의논 끝에 다시 남한행을 계획했다.
매번 길을 옮길 때마다 공안들과 증명서 검열 등 위험천만한 일들이 벌어졌다. 하지만 작은 희망과 인연들이 이곳까지 오게 했다고 그는 믿었다. 이후 심양에서 다시 북경으로 가 한국대사관을 통해 입국하려했으나 대사관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안기부 직원이라는 사람이 200원씩을 손에 쥐어준 것이 고작이었다. 그 돈을 가지고 그는 다시 톈진에서 밀항해 인천을 통해 들어왔다.
“다들 기적이라고 말했다. 마치 시나리오를 짜맞춘 것처럼 적시에 만난 인연들이 큰 힘이 됐다.”
▲귀순 생활의 시작
당시에는 탈북자 1명에 담당형사들이 한 명씩 붙어다녔다. 사실 박씨가 믿을 사람은 담당형사 뿐이었다. 그는 형사를 따라다니면서 자동차 면허도 따고 컴퓨터 등 남한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배웠다. 정부 측에서 취직도 해줘 회사를 다니며 50만원을 받아 월 15만원 셋방에서 귀순생활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한의사가 돼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당시 담당 형사와 24시간을 함께다녀야 했는데 그가 전립선 병을 앓고 있었던 터였다. 자주 화장실을 들렸고 보다 못해 당시 경동시장에 가서 약재를 사서 약을 지어줬다. 당시 그는 50만원짜리 한약을 먹고 있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후 형사는 “의대를 다닐 인물”이라며 한의대 입학을 적극 도왔다.
그는 청진의학대학 고려학부(한의학) 4학년을 중퇴한 탈북 전 경력을 인정받아 1995년 경희대학교 한의예과 2학년에 편입했고 열심히 공부했다. 키 160㎝를 조금 넘는 자그마한 체구의 박씨가 ‘남조선 드림’을 실현하기까지에는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나이도 많고 가정도 있어 하루하루가 힘겨울 때 그는 한약분쟁으로 인해 1996년 1년 동안 집단 유급을 당해야 했다. 1999년엔 천신만고 끝에 가족들을 모두 데려왔다.

▲남조선 드림_한의사 1호
이제 그에겐 탈북자 출신 제1호 한의사라는 꼬리표가 붙는다. 경희대 한의학과 본과 4학년 시절 제56회 한의사국가고시에 합격, 탈북자 중 처음으로 한의사 자격증을 받게 됐다. 2001년 탈북자 출신 첫 한의사 자격 취득에 이어 ‘1호 한의학 박사’까지 탈북자 출신으로 한의학 ‘1호’는 모두 차지하게 된 셈이다. 이후 막내 세현(35)씨가 2009년에 한의사가 됐고 셋째인 태현(40)씨도 지난달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하면서 탈북 3형제가 모두 한의사 자격을 땄다.
“환자에게 더 믿음을 주는 한의사가 되고 싶어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덧 박사까지 됐다. 공부 비법 그런 건 없다. 꾸준히 공부한 덕 같다. 한문은 줄줄 외웠다. 탈북자라는 이름이 무게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믿음을 얻기 위해서 앞만 보고 달려왔다.” 박사까지 17년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19년을 보내고 나서야 사람들의 불신도 사라진 느낌이다. 지금도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한 10년 열심히 해서 미국의 하버드 같은 곳에 가서 철학박사도 하고 싶다.”
▲재스민 혁명 북한에도 미칠까
시국이 불안하다. 튀니지발 재스민 혁명이 북한에도 불 조짐이라는 전문가들의 말도 나온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어렵다”는 설명이다. “북한 호위사령부에서 근무했던 경험으로 볼 때 군인들이 들고일어나기는 참 힘든 구조다. 식량난은 오랫동안 계속돼 온 문제라 새로울 게 없다. 사실 중동사태는 먼 나라 얘기다. 93년 탈북 때만해도 그랬는데 지금의 상황이 어떤 식으로 번질지는 모르겠다.”
kmk@ieve.kr /osenlife@osen.co.kr
<사진> 1) 한의사 자격증을 따는 데 6년이 걸린 셈이다. 이 기간 동안 박수현 원장은 한국인 아내와 결혼해 가정을 꾸렸고 천신만고 끝에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모두 데려왔다. 경기도 성남에서 묘향산한의원을 운영한지도 벌써 10년째. 탈북자들은 물론 박씨 형제의 소문을 듣고 많은 이들이 찾고 있다. 2) 탈북 형제 셋이 나란히 한의사가 됐다. 왼쪽부터 최근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한 셋째 박태현씨, 둘째 수현씨, 막내 세현씨다. 3) 박수현(오른쪽)씨가 군에 있을 때 찍은 가족사진. 왼쪽부터 동생 태현씨, 어머니, 형, 막내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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