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보는 민주화 성지
[이브닝신문/OSEN=김미경 기자] 어떤 이에겐 ‘빚’이었고, 또 다른 이에겐 ‘빛’이 됐다.
총 맞아 쓰러진 사람은 있는데 총을 쏜 자는 없다던 모순의 거리. 불타는 군용 트럭에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최루탄의 하얀 연기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여기저기선 신음소리가 들리고 청춘들은 하나둘 스러졌다.

역사가 남긴 오월에 대한 핏빛 회상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30년하고도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부끄러운’ 봄이다.
MB정부들어 대한민국의 인권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유엔 인권이사회에는 MB정부 출범 이후 최근까지 한국에서 개인의 의사 표현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됐다고 발표했다. 국제인권단체인 국제엠네스티도 지난해 연례보고서를 통해 표현의 자유 침해, 경찰력의 과도한 무력사용 등 한국의 인권상황이 지속적으로 후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혹자는 “31년이 흘렀어도 아직 5월을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시 오월이다. 영국 그래피티 작가 뱅크시의 팬사이트에선 한국 쥐에게 자유를 외치는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있고, 중동에서도 민주화 바람이 일고 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되짚어 보면 나라 곳곳에 민주화의 함성이 묻히지 않은 곳이 있으랴만 시대가 변하듯 함성을 울리는 방법도, 공간도 변하게 마련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진짜 이야기, 민초들이 밟은 민주화의 성지를 다시 짚어봤다.
캠퍼스
1960년 4월. 17세 소년 김주열군의 죽음은 더 이상 학생들을 책상에만 묶어둘 수 없었다. 학생의 본분이 공부인줄만 알았던 그날의 대학생들은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군의 주검 앞에 분노했다. 제 4대 정·부통령을 뽑은 그해 3월15일 선거가 부정으로 들어나면서 국지적으로 진행됐던 시위는 전국으로 번졌다.
그 도화선은 4월18일 고려대 학생들이었다. 머리에 ‘고대’라는 글씨가 쓰인 띠를 두른 채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교가와 애국가를 부르며 동대문을 지나 태평로까지 진격했다. 시위는 전국의 학생들을 단합시키는 계기가 됐고 이어 대학교수들마저 거리에 나서면서 결국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후일 민주화운동의 시발점으로 불리는 4·19혁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1987년 6월항쟁의 시작도 한 학생의 죽음에서 시작됐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로 9개월만에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극심한 탄압과 압박으로 1979년 10월26일 총탄에 의해 살해당한다. 그해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은 장기집권의 시나리오를 그리기 시작했고 민주주의 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헌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치안본부 대공 분실에서 조사받던 중 사망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시 전국적 시위가 일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4.13 호헌조치로 모든 개헌논의를 중단해 버렸다. 그러던 중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은폐 축소 조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시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면서 대학생들은 물론 그 동안 묵묵히 일하던 화이트컬러인 직장인까지 거리로 나오는 계기가 됐다.
학생과 직장인, 그리고 모든 민주주의 세력의 결집은 결국 6월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의 이른바 ‘6.29선언’이라는 직선제개헌 시국수습 특별선언으로 마무리됐다.
2011년 캠퍼스의 봄도 투쟁으로 바쁘다. 연일 뛰는 등록금에 비해 변하지 않는 학교 상황은 학생들의 투지에 불을 지폈다. 고려대, 숭실대, 이화여대 등 여러 대학이 학기 초부터 등록금 문제로 비상총회를 성사시켰고 경희대는 대학 중 처음 등록금 인상을 저지시키기에 이른다. 과거에 학생회를 중심으로 진행됐던 투쟁이 이제는 온·오프라인으로 혼합되며 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자생적인 목소리가 커지면서 투쟁은 이제 교문을 넘어섰다.
광주 금남로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 1980년의 광주다. 전라도 광주는 70년대 박정희 독재 때부터 희생양이 됐다. 철저히 소외됐고 민족을 다시 동서로 가르는 지역감정의 볼모가 됐다. 그해 일요일인 5월18일. 화창한 봄날이었지만 전국 곳곳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신군부는 전날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해놓고 있었다. 오후 4시 광주 금남로와 충장로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M16소총을 든 군인들과 마주하고 있었고 거리에는 구경꾼도 섞여 있었다.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총을 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열흘간의 5월 광주항쟁은 그렇게 시작됐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냐던 핀잔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누고 부상자들에겐 피를 보탰다. 내 것, 네 것은 없었다. 80년 광주 금남로를 채웠던 광주시민은 군부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민주화를 요구했다.
구 전남도청을 마주하고 금남로에 서보면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청 앞 분수대에서 시작해 금남로 사거리를 지나면 대인시장과 광주역으로 통한다. 그 길은 망월묘역까지 펼쳐나간 후 다시 순환의 회귀점에 선다.
여기 네 이름을 썼다, 민주여
광화문
4·19혁명으로부터 직선제를 쟁취한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정부가 들어선 1990년대말까지.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봄은 연일 시위대와 전투경찰의 대치상황이 계속됐다. 각 대학에서 출정식을 마친 학생들, 시내 곳곳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노동자 시위대는 명동과 종로, 서울시청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진이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던 곳은 광화문 네거리. 광화문 네거리는 정부가 내줄 수 없는 마지막 보루였다. 이곳이 뚫리면 곧바로 청와대까지 시위대를 막을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곳을 사수해야 했던 이유는 바로 도로 앞 미 대사관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역대 최우방국인 미국의 한국내 심장을 방치하는 것은 정부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물대포에 최루탄, 전투경찰들의 진압봉이 가장 무섭게 휘둘려진 곳이 광화문이었다.
광화문에 실제로 벽이 쌓인 것은 역설적이게도 민주화가 한창 진행된 2008년이었다. 광우병소 수입문제를 놓고 시민들의 촛불이 환하게 타오를 무렵, 광화문 네거리에는 일명 ‘명박산성’이 세워졌다. MB정부는 스스로 국민과의 소통을 단절하고 경찰차벽을 둘렀다. 소통의 단절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서울광장
축제 장으로의 귀환이다. 정확히 15년전에 넥타이를 맨 시민들이 비장함 속에서 서울광장을 나섰다면 2002년 6월10일 시청일대는 한마디로 축제의 현장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붉은 티셔츠 차림의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광장의 한쪽에는 미군 장갑차에 의해 운명을 달리했던 미선이와 효순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집회가 열렸다. 한창 축제가 치러진 광장은 전과 사뭇 달랐다. 마음껏 즐겼고 스스로 함께 모였으며 또 나눴다.
2004년 시민들은 광장을 중심으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자 시민은 거리에 나와 탄핵반대시위를 벌였다. 탄핵은 실패했고 탄핵 주도세력은 총선에서 심판받았다.
2008년엔 또 다른 광장혁명이 일어났다. MB정부가 국민과의 소통 없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협상을 끝내버리자 분노한 시민이 광장으로 몰려나왔다. 야당이나 시민단체들의 ‘선동’은 없었고 시민들 ‘스스로’가 모여 정부를 질타했다. 이 대통령은 사과했고 추가협상이 이뤄지는 승리를 얻게 됐다.
올해도 어김없이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 것이다. 2008년 촛불의 축제 이후 3년만이다.
봉하마을
역사는 되풀이되는 것일까. 1998년 이어 2002년 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민주주의가 완성된 듯이 보였다. 일명 ‘노풍’의 주역에 국민들도 이를 의심치 않았다. 탄핵에 이은 검찰의 질긴 수사. 이후 노 전 대통령 서거는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민주주의의 기폭제가 된다. 추모인파는 수백만명을 넘어섰고 사람들은 그의 못다 이룬 귀향의 꿈을 애통해했다. 누군가는 묵묵히 봉화산에 오르고 나눔과 연대를 다짐할 것이다. 봉하는 이제 민주주의 흐름이 남긴 성지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 n개의 노무현, 진보의 미래가 촛불의 희망을 든다. 다시 민주주의다. 더욱 숙성되고 견고해질 것이므로···.
온라인
대한민국의 시민혁명은 광장에서만 이뤄진 게 아니다. 한 달 이상 계속된 광화문 촛불집회 열기 이면에는 웹사이트 다음의 토론광장 아고라가 있었다. 이곳에서 누리꾼들은 정보를 공유하며 활발한 토론을 벌였고 이는 촛불집회라는 행동으로 이어졌다. 2008년 5월부터 본격화된 촛불집회는 8월까지 총 2000여차례 계속됐다.
기존의 미디어 공론장을 뛰어넘는 아고라의 발견은 그 때문에 의미가 크다. 아고라에서 사람들은 서로의 발화와 진술, 주장과 의견을 다양한 형식으로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토론문화, 민주주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방인’이 아닌 ‘나’가 존재하는 참여의 확대였다.
이후 촛불과 토론의 후유증은 컸다. 정부는 발 빠르게 포털에 대한 규제안을 내놓기 시작했다. 이러한 규제들은 ‘미네르바’ 구속 등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사람들은 촛불을 먼저 끌 생각이 없었다. 더욱 똘똘 뭉친 셈이다. 지난해 지방선거에 이어 이번 재·보선에서도 트위터의 정치적 의미는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놀이 정치의 탄생이다. 수많은 보통사람의 자발적 참여를 이끈 SNS는 직접 소통하고, 의제를 설정, 투표를 독려하며 세상을 바꾸고 있다.
살아 남은자의 슬픔
수유리 4·19묘역=오월이면 누군가에게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무기력한 말들이 곧추 세워진다. 방향을 잃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또 무언가 그만두고 싶어지는, 그 서럽고 비릿한 마음들이 성큼 솟아나는 것이다. 크고 작은 소대의 일을 앞두거나 치를 때면 정치인들이 발길을 옮기는 이곳은 바로 4·19혁명의 주역들이 묻힌 수유리 묘역이다. 타협을 몰랐던 이들이 묻혔다. 안착 대신 저항을 택했던 그들의 민주주의를 찬양하는 의미에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낙관만을 실없이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망월동=1980년 민주화 현장의 증언이다. 당시의 아픔들이 오롯이 새겨지는 곳. 광주 망월동이다. 원혼들을 달래기 위한 헌화가 이어지는 5월의 광주 망월동에는 그렇게 그 잔혹했던 참사를 기린다. 말할 수 없는 공허감, 그날의 분노가 함께 묻혀 있다. ‘시대의 지식인’ 고 리영희 선생도 2010년 오월 안식에 들었다. ‘망월동 묘역에 묻히고 싶다’는 고인의 유언에 따라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광주의 품에 안겼다.
모란공원=민주의 성역이다. 모란공원은 지난 1970년 11월 열악한 노동현실을 고발하며 분신했던 청계천 전태일 열사 이래 주로 노동학생운동과 관련해 숨진 유해가 묻혀 민주성역으로 자리잡았다. 산업재해 희생자들도 영면에 들었고 경찰의 고문으로 숨진 서울대생 박종철군의 가묘도 89년 3월 이곳에 마련되면서부터 학생운동가, 문익환 목사의 유해도 잇따라 묻혀 제2의 광주 망월동 묘지로 불린다.
명동성당=명동성당은 시위가 열릴 때마다 투쟁의 요처가 됐다. 재야인사·학생들의 집회와 농성은 물론 철거민·빈민·외국인 노동자 같은 소외계층이 울분을 토로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특히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 1987년엔 6월 민주화항쟁의 산실로 하루가 멀다하고 시위와 농성이 이어졌다. 쫓기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몸을 맡기는 피난처였던 셈이다. 과거와 비교하면 김수환 추기경 서거 후 그 의미가 퇴색됐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소수자,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마지막 호흡인 것은 분명하다.
kmk@ieve.kr /osenlife@osen.co.kr
<사진> 80년 오월의 광주 금남로에는 수십만명에 달하는 거대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용수철처럼 싸웠다. 민주의 봄은 그렇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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