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주의와 함께한 다큐
[이브닝신문/OSEN=신상미 기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투쟁은 거리와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때론 책으로 때론 영화로 자신들을 채찍하기도 했다. 극영화 일색인 극장가에 언제부터인가 민주화 운동을 다룬 다큐들이 하나 둘씩 선보이기 시작했다. 개봉 당시엔 큰 주목을 못받았지만 잊혀지기엔 안타까운 작품들을 소개한다. 대부분 소규모 개봉을 했거나 인터넷 보드 서비스, 영상자료원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다.
5.18과 6.10을 기억하는 영화들

지난 2008년 한국을 찾은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촛불시위에 접한 후 “스펙터클한 형태의 민주주의 재발명”이라고 극찬했다. 만약 그가 그보다 반세기 전의 4.19나 그후의 5.18, 6월 항쟁에 대해 알았다면 ‘촛불의 발명’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지 않았을까.
지난 12일 개봉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오월애’는 광주항쟁에 직접 참여했던 이들을 만나 30년 전과 현재의 삶을 오가며 5.18이 남긴 것들을 담담히 돌아보는 영화다. 80년 5월의 광주를 설명하기 위해 권위 있는 학자나 전문가들을 찾는 대신 그 자리에 직접 존재했던, 그리고 여전히 그 열흘을 잊지 못하는 ‘이름 없는’ 이들의 증언을 담아낸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지난 2007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오월상생’은 5.18소재 영화로는 드물게 30분 분량의 애니메이션 작품. 80년대 대표 민중가요 5곡과 광주에 얽힌 삶과 죽음, 긍정과 희망의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6월항쟁’에 관한 영화인 ‘명성 그 6일의 기록’은 한국독립영화계의 대부 김동원 감독의 97년 작품. 김 감독은 6월항쟁 당시 명동성당에 머물며 시위대에 참여하게 된 체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완성했다. 그는 당시 한국독립영화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상계동 올림픽’을 촬영하며 상계동 주민들과 함께 명동성당 안에 머물다 이 극적인 역사의 한 순간에 동참하게 됐다. 낡은 기록필름 속에 담긴 6월 항쟁과 뒤이은 7월의 노동자대투쟁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경험을 제공한다.
분단의 희생자가 바라본 대한민국의 초상
홍형숙 감독의 ‘경계도시2’와 김동원 감독의 ‘송환’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닮은 영화들이다. 송두율과 비전향장기수들은 모두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들은 모두 대한민국 사회로부터 소위 말하는 ‘전향’을 강요당한다. 남과 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그들은 자기 신념과 생존을 병행할 수 없어 둘 중 한 가지 선택만을 끊임없이 강요당한다. 그들은 국민 개개인이 자유로운 개성적 인간으로 살 수 없었던 암울한 시대와 한반도 분단의 희생자 임에도 이제 대한민국 사회는 그들에게 진 빚을 완벽하게 잊고 ‘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홍 감독과 김 감독 모두 10년이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영화에 매달려 있었는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두 작품 모두 극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재밌다는 것. ‘다큐는 극영화가 되고자 하고 극영화는 다큐가 되고자 한다’는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영화들이라 할만하다.
상상력에게 권력을
‘낙선’과 ‘레즈비언 정치도전기’는 민주주의의 가장 핵심적 제도라고 할 수 있는 선거제를 둘러싸고 ‘불복종’이라는 시민의 무기가 어떤 방식으로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는지 그려냈다. 낙선은 2000년 4.13총선 당시 낙선운동을 전개했던 총선시민연대 사람들의 활동을 충실히 기록한 작품이다. 낙선운동을 불법으로 낙인찍고 실랑이를 벌이는 선관위 소속 공무원의 모습과 부천을 방문한 박원순 변호사의 보행을 막는 헤프닝은 현재에도 생생하게 다가온다.
‘레즈비언 정치도전기’는 2008년 진보신당 최현숙 국회의원 후보의 출마과정과 14일간의 유세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그렸다. 최 후보는 한국정치의 후진성과 여성, 이혼녀, 레즈비언이라는 편견 속에서, 무엇보다 낙선할 것을 알면서도 동료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선거에 도전했다. 깔끔한 만듦새와 다큐 같지 않은 재미를 보장하는 작품. 시기적으로 10년 가까운 차이가 있지만 2편 모두 딱딱하지 않고 유쾌하며 권력을 가진 이들보다 ‘재밌게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수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모세혈관처럼 일상에 퍼진 파시즘에 저항하기
‘뻑큐멘터리- 박통진리교’와 ‘주민등록증을 찢어라’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라 할 만한 박정희라는 기표로 연결돼 있는 작품들이다. 주민등록증을 찢어라에서 박정희는 만주국 군관 시절의 경험을 십분 살려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전국민을 번호를 매긴 재고품으로 전락시키고 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에선 살아 있는 신처럼 유신세대 위에 군림한다. 그리고 박정희라는 거대한 신화에 눌린 우리는 감시와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복종을 내면화한다. 민주주의란 정부가 투명해질 수 있도록 국민이 정부를 감시하는 시스템이다. 하지만 역으로 우리는 정부로부터의 감시와 통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러니에 처해 있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북한 인권
북한에 관한 다큐들은 남한에서보다 일본이나 유럽에서 많이 제작됐다. 실제로 일본의 (비디오) 저널리스트들은 남한 언론보다 중국 및 북한에 더 많은 취재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북한 상황에 대해 더 깊은 정보와 진지한 관심을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나라’(대니얼 고든 감독)같은 비교적 초기에 만들어진 다큐들은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견지하지만 최근에 제작된 ‘북한 노동자의 하루’ ‘김정일리아’는 북한에 대해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재일한국인 양영희 감독은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등의 작품을 통해 북송선을 탄 가족과 일본에 남겨진 가족 사이의 오랜 그리움을 그림으로써 북한 주민들에게 드리운 폭력의 그림자를 고발한다.
다큐 영화 작가는 벽에 붙은 파리?
많은 이들이 다큐멘터리스트를 ‘벽 위의 파리’(Fly on the Wall)에 비유한다. 카메라가 비추는 현실과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그것을 특정한 시각으로 재구성하지 않으며 오직 ‘관찰’이라는 방식을 통해 ‘일상적 사실성’을 보존하려는 태도가 감독의 미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다큐 영화 작가들은 인위적 세트 촬영 배제, 롱쇼트(원거리 촬영), 롱테이크(장시간 촬영), 편집의 최소화 등의 영화 문법을 강조하고 고수한다.
shin@ieve.kr /osenlife@osen.co.kr
<사진> 오월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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