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 바늘 튀는 소리도 정겹다
OSEN 강희수 기자
발행 2011.05.18 19: 15

- 그때가 그리운 아날로그 열풍
[이브닝신문/OSEN=오현주 기자] 바로 사그라질 줄 알았다. 맹렬히 달아오르다 식어버린 냄비가 어디 한두 개였나. 그저 한때려니 했다. 그래야 한국인이니까. 그런데 이번에 몰아닥친 아날로그 열풍은 좀 달랐다. 그 결정적 지표가 된 통기타 판매량만 봐도 그렇다. 두세 달이면 뚝 떨어질 줄 알았던 판매 추세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질 않는가. 2011년 밀려든 이 독특한 풍경은 천장까지 LP로 꽉 채운 다양한 음악카페들에서도 펼쳐진다. 거의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 셔터를 내렸던 그 장소들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손님맞이에 분주하다. 탁한 듯 잔잔한, 깊은 듯 가벼운 통기타의 울림이 아날로그의 실체라면, ‘지지직~’으로 시작되는 LP의 뜸들임이야 말로 아날로그의 본원이다.
 
기타 하나로 ‘위탄’ ‘슈스케’ 넘본다
지난 5일 오후 대한민국의 대표적 악기상가인 낙원상가를 찾았다. 어린이날에 걸맞게 꽃피는 산과 들로, 놀이공원으로, 또 대형마트 게임기 매장에만 인파가 몰리려니 했던 예상은 빗나갔다. 낙원상가로 나들이를 나선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매장 곳곳에 앉아 기타 교습을 받고 있는 모습도 자연스러웠다.
‘세시봉’에서 댕긴 아날로그의 불길이 번진 곳은 낙원상가다. 기분 좋은 불길이다. 이곳에서 20년째 기타를 판매하고 있다는 박주일(46·에클레시아 대표) 씨는 “올해 1∼3월 매출이 지난 해 같은 기간에 비해 20∼30% 성장세를 보였다”고 말한다.
디지털의 강세에 밀려 10년 넘게 천대받다시피 한 어쿠스틱이 다시 회생의 조짐을 보인 건 2∼3년 전부터. 박씨는 이 추세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었다”고 했다. 중국과 일본 등 전 세계 어쿠스틱 기타 공장들이 바빠진 것도 이 즈음이란 것. 그러던 것이 지난 4∼5개월 전부터 피부에 ‘확~’ 와 닿았다. ‘세시봉’을 비롯해 ‘슈퍼스타K’ ‘위대한 탄생’ 등 다양한 TV 오디션 프로그램들이 불을 댕긴 것이다. 중장년층은 물론 10∼20대, 하다못해 은색 퍼머머리를 휘날리는 할머니들까지 이 분위기에 가세했다.
시기도 잘 맞아 떨어졌다. 지난 2∼3월, 설날 명절을 비롯해 지갑이 열리는 방학, 신학기가 몰린 것이 호재가 됐다. 4∼5월이라고 매출이 떨어진 건 아니다. 박씨의 표현대로라면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상태”다. 달라진 점이라면 평일 손님이 주말에 몰리고 있는 정도다.
 
박물관 빠져나온 LP의 부활 
내친 김에 홍대 앞으로 향했다. 20세기 유물로 박물관에나 있어야 할 LP들이 잘 나가는 음악카페의 새 주역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던 터다.
빙빙 도는 턴테이블에 얹힌 판 위로 바늘이 쓱쓱 긁히는 인간미 넘치는 소음이 매력적인 LP 음악엔 매끈한 CD나 MP3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 있다. 공유다.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각자 알아서 디스크자키를 하고 주크박스를 흔드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물론 한창 LP를 듣던 시절엔 요즘처럼 뮤직 플레이어가 흔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1960∼70년대 어려운 시대를 함께 보내자니 음악까지 나눠야 했고 그럴 만한 공간도 필요했다. 야전(야외전축), 빽판(불법복제음반), DJ(디스크자키)나 음악다방, 음악감상실 같은 전문용어는 그 부산물이다.
그런데 그 공간이 되살아나고 있다. 10년째 홍대 앞 LP 음악카페에서 일하고 있다는 윤정환(27·‘별이 빛나는 밤에’ 매니저) 씨는 “최근 몇 달 새 홍대 언저리에 LP 카페가 10여군데까지 늘어났다”고 말한다. 홍대 앞뿐만이 아니다. 서울 중구 태평로와 정동 두 곳에 있는 ‘음악과 사람들’, 강남구 신사동 ‘트래픽’이나 ‘피터 폴 앤 메리’ 등은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서울의 LP 카페 명소다. LP를 판매하는 매장도 늘었다. 서울 중구 회현동 지하상가에는 10여개의 LP전문점이 성업 중이다. 2000년대 초반 4개까지 줄어들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고즈넉한 ‘별이 빛나는 밤에’를 가르는 것은 까만 LP의 정갈한 회전이다. 30∼40대 손님이 꾸준한 편이라는 이곳에선 메모지에 휘갈겨 쓴 필체로 음악신청을 해오는 손님도 적잖다. 보통 비틀즈, 아바가 턴테이블을 돌고 내려오면 자연스럽게 김현식, 김광석이 뒤를 따른다고 윤씨는 귀띔했다.
 
쏠림 견제할 괜찮은 대안이다
아날로그의 거센 바람은 공연문화의 복고 트렌드로도 이어지고 있다. 선두 주자는 창작 음악극 ‘천변카바레’. 1960년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요절가수 배호(1942∼1971)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작품은 지난해 11월 초연한 후 그 인기에 힘입어 올해 3월 앙코르 공연을 올렸다.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이 5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2011년과 섞이리라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4월에 초연한 뮤지컬 ‘광화문연가’도 아련한 지난 정서를 만들어냈다. ‘옛사랑’ ‘가로수 그늘 아래서면’ 등 가수 이문세의 무수한 히트곡을 작곡한 이영훈의 노래들로 만들어진 극이었다.
2011년 상반기 대한민국은 양분됐다. 요지경 세상을 축소해 담은 스마트폰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반면, 덩치가 산만한 통기타 한 대에 세상만사의 추억과 회상을 싣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무엇보다 칼끝처럼 똑 부러지는 디지털에 질린 사람들이 아날로그를 찾는 듯 보인다. 누군가는 “아날로그의 끝자락에 걸쳐 있는 386세대가 40대가 돼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복고를 향한 추억을 끄집어냈다”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요즘 젊은이들이 아날로그조차 새 트렌드로 받아들인다”고도 말한다.
어찌됐든 쏠림을 견제할 대안이란 면에선 긍정적이다. 기타를 파는 박씨는 “기타 몇 대 더 팔 수 있다는 것보다는 아이돌, 걸그룹에 미쳐가는 대중음악계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측면에서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결국 개인의 취향의 문제로 남겠지만 관대해지기는커녕 점차 경직돼 가는 사회에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한 좋은 밸런스인 것은 틀림없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euanoh@ieve.kr/osenlife@osen.co.kr
<사진>*‘낙원상가’의 한 기타판매점. ‘잘빠진’ 기타들이 첨단화된 디지털시대의 반대편에 묻힌 원초적인 감성을 부채질한다.  *홍대 앞 LP 카페 ‘별이 빛나는 밤에’. 사람냄새 묻어나는 LP의 소음, 그 수고스러움조차 즐거운 이들이 찾는다. /정은진 기자 jj@iev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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