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내가 진작 이렇게 운용했었어야 했다".
지난 5월. 지금은 지휘봉을 놓은 김경문 두산 베어스 전 감독은 이용찬(22), 홍상삼(21), 서동환(25) 등 젊은 선발투수들을 로테이션에 가담시키면서 회한의 한숨을 지었습니다. 물론 이들 중 현재 로테이션을 지키는 투수는 이용찬 한 명 뿐이지만 제가 여러분께 알리고 싶은 것은 그 결과가 아닙니다.

3개월이 지난 8월 23일 문학 SK전. 선발로 나선 해외파 베테랑 우완 김선우(34)는 7이닝 2실점 호투로 시즌 10승(7패, 24일 현재)째를 거뒀습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5년 연속 10승 이상을 거둔 김상진(SK 투수코치)에 이어 16년 만에 베어스가 배출한 3년 연속 선발 10승 국내 투수입니다. 두산으로 이름이 바뀐 1999년 이후 팀이 배출한 첫 3연속 10승 국내 투수입니다.
두 개의 이야기. 이는 두산이 그동안 얼마나 전도유망한 선발 유망주를 배출하지 못했는가를 일깨워줍니다. 그나마도 김선우는 메이저리그-마이너리그서 10여 년을 활약했던 선수입니다. 두산 팜에서 제대로 '한 시즌 10승 이상이 보장된' 전도유망한 선발투수를 키우지 못했다는 뜻인데요.
시야를 1995년으로 돌려보겠습니다. 그 해 17승을 거둔 김상진과 15승의 권명철(LG 투수코치)을 앞세웠던 베어스 마운드는 이듬해 권명철의 부상 이탈로 위기를 맞으며 최하위로 추락했습니다. 1995년 1차 지명이던 건국대 출신 송재용도 첫 해 3승을 끝으로 팬 시야에서 사라졌구요. 김상진과 권명철도 각각 트레이드를 통해 삼성, 해태로 떠났습니다.
결국 대체자가 필요했는데 이를 대신해 두각을 나타낸 선수들이 바로 박명환(LG)과 이경필이었습니다. 1996년 1차지명이던 박명환은 1998년 14승을 올렸고 이경필 또한 1998년 10승에 이어 1999년 13승으로 강병규와 함께 팀 내 최다승 투수가 되었네요.
그러나 이들은 모두 부상으로 나가 떨어지며 최소 1시즌 반 이상의 공백을 낳았습니다. 타이론 우즈-김동주-심정수 클린업 트리오의 화려함 속 선발 에이스 부재라는 치명적 약점이 숨어 있었네요.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두산은 그 해 10승 투수 한 명 없이도 챔피언이 되는 기묘한 전례를 보여줬습니다.
2000년대 초반까지 구단의 투자와 선발형 유망주 발굴 작업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기존 에이스였던 김상진이 삼성으로 가는 과정에서 그 어떤 반대 급부 선수 없이 현금 트레이드만 있었음은 당시 구단의 투자가 얼마나 빈약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또한 2000년대 초반 신인으로 입단했던 문상호, 황규택 등은 소리없이 사라졌습니다. 2002년 이재영(SK)이 1차지명 입단했습니다만 그는 선발보다 계투로 뛰었습니다. 이후 선발진의 얼굴마담은 외국인 투수들이 차지했구요. 다시 위력을 찾은 박명환이 2004년 12승, 2005년 11승으로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만 2006시즌에는 갑상선 항진증과 부상으로 7승에 그쳤습니다. 2004년 9월 직격타가 된 병풍도 가뜩이나 허약했던 국내 투수층을 더욱 얄팍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병풍 1차 피해시기이던 2005년 김경문 감독은 기존의 맷 랜들에 6월 좌완 전병두(SK)를 KIA에 내주고 우완 다니엘 리오스를 영입, 이방인 원투펀치로 선발진을 꾸렸습니다. 이들은 2007시즌까지 함께 3년 연속 10승 이상을 수확하며 팀을 이끌었지만 그들의 바통을 잇는 믿음직한 선발 투수의 존재가 아쉬웠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김명제(임의탈퇴)입니다. 김명제는 데뷔 시즌이던 2005년 7승을 거두며 가능성을 비췄습니다만 2006년 선발-계투를 오가며 11패(3승)를 떠안고 말았습니다. 2007시즌 아쉬움 속 4승에 그쳤던 김명제는 2008년 7승으로 다시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듯 했지만 잇단 부상 등으로 침체된 뒤 음주 교통사고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나마 김명제의 경우는 팀 이탈 전까지 선발로서 어느 정도 기회를 얻은 케이스입니다. 입단 동기생인 서동환은 2005시즌을 마무리로 시작했다가 큰 코를 다친 뒤 좀처럼 1군 전력으로 맹위를 떨치지 못했습니다. 2006년 1차 지명자 남윤희는 꿈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네요.

좋은 기회는 한 번 더 왔습니다. 2007년 장충고 이용찬, 서울고 임태훈 두 당시 최고 우완 유망주가 팀에 나란히 1차 지명 입단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선발로 나선 것은 수 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병풍으로 인해 이재우, 이재영, 구자운(삼성) 등 기존 계투 요원들이 공백을 낳았고 복귀 후 제 위력을 발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1군 전력이 되었을 때 그 즉시 계투로 뛰어야 했습니다.
이용찬은 팔꿈치 수술과 어깨 부상 등을 겪고 2009년부터 본격 마무리로 나섰습니다. 2007년 전지훈련서 5선발 후보로 꼽혔던 임태훈은 곧바로 셋업맨 보직을 맡았네요. 2차 1순위였던 이원재는 제구난으로 아쉬움을 주다가 두 번의 팔꿈치 수술로 아직 2군에 머물러 있습니다. 2008년 1차 지명 좌완 진야곱은 허리 부상이 고질화되고 말았고 2009년 1차 지명 성영훈은 팔꿈치 수술 후 현재 공익근무 중입니다. 2009년 9승을 올린 2차 3순위 홍상삼도 어느 순간 정체된 모습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지난해 1순위 장민익이나 올해 신인 최현진 등은 아직 배우는 입장이기 때문에 선발로서 기회 부여 여부를 논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두산은 대형 유망주가 입단한 뒤 선발보다는 계투로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앞서 언급된 병풍의 여파도 있었지만 구위가 괜찮은 유망주를 일단 계투로 활용하던 전략도 되돌아볼 만 합니다. 물론 그 길을 돌아보면 굉장히 특별한 이유도 있습니다.
"김경문 감독 부임 초기 두산은 언제나 선수층이 얇아 전문가들로부터 최약체로 분류되어 왔다. 그래서 초기에는 성적에 대한 부담없이 선수들이 마음껏 뛰었고 그 결과 어느새 포스트시즌 진출이 보장되는 팀이 되었다. 그러자 구단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더 나은 성적을 기대하는 시선이 커졌다. 그리고 그게 김경문 감독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 선발형 유망주를 키워쓰는 리빌딩 전략도 필요했던 시기 좀 더 많이 이기는 야구를 추구해야 했던 김경문 감독의 고충을 잘 아는 한 야구인의 회고입니다.
김선우야 메이저리그서도 잠재력을 인정받았던 투수인 만큼 15억원 거액에 두산 유니폼을 입었고 그래서 팀이 선발로 활용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만 25세 미만의 선발 유망주가 적어도 한 시즌 이상 꾸준히 로테이션을 지킨 경우가 최근 들어 거의 없었음은 팀 입장에서도 돌아볼 만 합니다.
성적에 대한 기대치가 크지 않던 순간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리빌딩 작업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언젠가부터 성적에 대한 기대치가 커지면서 투수 유망주에게 승패 기록 결과 여부를 묻지 않는 꾸준한 출장 기회 부여가 그리 많지 않았다는 점. 김선우의 3년 연속 10승을 바라보며 갑자기 김경문 감독의 회한 섞인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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