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 아닌 이변은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양대 리그(1999~2000)에서 단일 리그로 환원된 2001년 이후,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정규리그 1위 팀을 하 순위 팀이 제압하고 정상등극에 성공한 것은 2001년 두산(정규리그 3위)이 당시 1위 팀 삼성을 누르고 우승(4승 2패) 트로피를 가져간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언제나 한국시리즈 우승은 정규리그 1위 팀 차지였다. 전쟁 같은 싸움을 치르지 않고 결승 무대에 미리 올라가 있는 정규리그 1위 팀을 꺾는 일이 하 순위 팀들에게 쉽사리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줄임 말로 '넘사벽')으로 굳어져버린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원인을 들추자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시리즈 직행 팀 앞에 번번이 무릎을 꿇었던 팀들의 패인이 거론될 때마다 가장 많은 빈도수를 차지하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플레이오프 혈전을 통한 전력손실 부분이다.

2011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 1승 4패로 주저앉은 SK가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치러낸 경기수는 총 14경기(준 플레이오프 4경기, 플레이오프 5경기 포함). 단일 팀으로는 역대 시즌 최다 경기다. 한국시리즈에 이르기 전, 큰 경기를 9경기나 치러야 했다는 것은 아무리 체력적인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하다는 야구이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선수들이 받는 누적 피로도와 중압감은 결코 가벼이 흘릴 수 없는 부분이다.
근래 단기전의 제왕으로 군림하며 전인미답의 5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대 위업을 이룬 SK였지만, 거듭된 혈투가 가져온 주전 투수들의 부상과 구위 저하라는 극복 불능의 상황 앞에 정신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2001년 정규리그 3위 팀 두산이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연달아 거쳤으면서도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던 데에는 두 번의 하위 시리즈를 모두 단기전(2전 전승과 3승 1패)으로 조기에 끝냈다는 사실에 힘입은 바 크다.
또한 쿠데타(?)에 실패하긴 했지만 2003년 정규리그 4위였던 SK가 1위 팀 현대를 상대로 한국시리즈 최종전인 7차전까지 물고 늘어지는 끈끈함을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준 플레이오프(2전 전승)와 플레이오프(3전 전승)를 일사천리로 마감한 덕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음은 한국시리즈에 대비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없음에 따른 투수 운용부분의 어려움을 들 수 있다. 천신만고 끝에 이번 한국시리즈에 합류한 SK의 1차전 선발투수는 팀의 에이스도 2선발도 아닌 고효준이었다. 주력 투수를 이미 소진한 상태에서의 막다른 전략상 선택이었다. 반면 삼성은 가장 컨디션이 좋은 투수들 중, 상대 카드에 따른 맞춤형 선발을 내어놓았다.
지금까지 준 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모두 거쳐 한국시리즈에 올랐던 총 5번(2001~2003, 2006, 2011)의 사례에서 하 순위 팀이 제대로 된 에이스급 선발을 한국시리즈 1차전에 내세웠던 경우는 2006년 한화의 류현진이 유일했다. 2001년 두산은 이경필을, 2002년 LG는 김민기를, 2003년 SK는 이승호를 각각 마운드에 올렸다. 그리고 이번 고효준(SK)까지, 공통점이라면 5번 모두 하 순위 팀이 패했다는 것. 7전 4선승의 상대적으로 중기적인 투수 운용계획을 그려볼 수 있는 한국시리즈지만 기선을 제압당한 상태에서 시리즈를 시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상황 반전이 더욱 어려운 국면으로 들어섰다는 얘기로 결과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지금처럼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1위 팀에 자동적으로 부여하는 방식 아래에서 하위 팀이 순위 반란을 이뤄낼 수 있는 뾰족한 수는 없는 것일까?
이는 과거 역사를 들춰보면 약간의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이미 얘기한 바대로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는 투수력의 약세를 공격력을 통해 보완하는 방법으로 정상에 올라섰던 팀들의 사례가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1년 두산이 변변한 10승 투수 한 명 없이도 두 자릿수 승수 투수를 4명이나 보유한 1위 팀 삼성을 침몰시킬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타력이었다. 당시 두산의 한국시리즈 경기당 평균 득점은 8.6점. 톱타자 정수근을 필두로 장원진-우즈-심재학-김동주-안경현-홍성흔으로 이어지는 막강 타선을 내세워 삼성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이라는 비장한 꿈을 산산 조각 낸 바 있다. 이해의 한국시리즈 MVP는 타율 3할9푼1리(23타수 9안타), 4홈런 8타점을 몰아친 두산의 외국인 선수 타이론 우즈였다.
한편 프로출범(1982) 후부터 이어져온 전, 후기리그제를 버리고 단일리그제로 전환한 1989년 이후부터 양대 리그를 채택하기 이전인 1998년까지의 10년간 포스트시즌 경기역사를 살펴보면 정규리그 하위 팀이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1위 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한 전례가 2차례 눈에 띄는데, 해태(1989)와 롯데(1992)가 그 주인공이다.
해태는 1989년 5할5푼8리의 승률(65승 51패 4무)로 정규리그 2위를 기록하고도 승률 6할4리라는 높은 승률(71승 46패 3무)로 한국시리즈에 미리 올라가 있던 빙그레를 맞아 4승 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우승을 차지했었다. 선동열과 이강철을 앞세운 투수진이 이상군-한희민-송진우-한용덕을 내세운 빙그레 마운드에 비해 약간 열세라는 평도 있었지만 해태는 이순철-김성한-한대화-박철우-김종모-장채근 등의 중량감있는 타선을 무기로 빙그레와의 전년도에 이은 리턴 매치를 다시 한번 승리로 마감하며 한국시리즈 4연패의 위업을 달성해냈다.
또한 1992년에는 롯데가 5할6푼3리의 승률(71승 55패)로 리그 3위로 밀려나고도 6할5푼1리라는 약 1할 가까이 높은 압도적인 시즌 승률(81승 43패 2무)을 기록했던 빙그레를 찍어 누르고 역시 하위 팀의 반란을 혁명으로 승화시켰던 역사를 갖고 있다.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하위 팀에게 우승을 헌납한 빙그레로서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너무 아픈 기억일 터.
이상 양대 리그 시기를 전후로 치러진 총 21년간의 단일리그 한국시리즈 역사를 합치면 하위 팀이 1위 팀을 넘어뜨린 경우는 모두 합쳐 단 3번(1989, 1992, 2001년)뿐이었다. 확률로 따져 겨우 1할이 넘는 낮은 수치다.
통계가 이쯤이고 보면 거의 해마다 1위 팀의 재 우승(?)확인이라는 뻔한 답안의 연속으로 귀결된 한국시리즈 결과와 성적표가 던져주는 물음에 우리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결과가 나타난 경기적인 원인은 앞서 장황하게 다룬 관계로 성적표가 제기하고 있는 물음에만 접근해보도록 한다.
그것은 현재 한국프로야구가 갖고 있는 리그운영의 제도적인 한계에 기인하고 있다. 8팀이 단일리그를 통해 순위를 가리고 포스트시즌 진출팀을 가리는 일에 있어 1위 팀에 일정 부분의 어드밴티지를 할당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천편일률적인 한국시리즈 결과를 만들어내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리그 1위 팀이 매번 우승을 차지하는 일이 잘못된 현상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한국시리즈 무대에서 1위 팀과 맞붙는 상대 역시 정상적인 전력으로, 아니면 같은 조건하에서 1위 팀과 자웅을 겨뤄볼 수 있는 제도적인 보완책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가장 이상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1위-4위, 2위-3위 팀간의 플레이오프를 거쳐 한국시리즈를 여는 방식은 역시 1위 팀에 대한 메리트가 거의 없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한국프로농구에서 보듯 1위와 2위 팀에 4강 직행권이라도 보장할 수 있는 어드밴티지를 주기 위해선 6팀 정도를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켜야 하는데 지금의 8개 구단으로는 지나친 티켓 확대이다. 1위에 4위를 붙이는 자체가 순위에 따른 어드밴티지라고 볼 수 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팀 수 앞에서 커다란 잇점은 되질 못한다.
1999~2000년 이미 시행착오를 겪었듯이 리그 팀 수가 충분하지 않은 관계로 양대 리그로 분리하는 방안도 현재는 실효성이 떨어져 보인다. 플레이오프 시리즈 별로 경기수를 조절하는 방식이 대안으로 떠오를 수 있지만 이미 이런 저런 접근을 시도해 본 상태에서 추출해 낸 것이 지금의 제도이다. 미래의 이야기이지만 한국프로야구가 10개 구단으로 늘어난다면 지금보다는 좀더 그럴듯한 포스트시즌 경기제도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다.
이쯤에서 따라올 법한 의문 하나. 미국의 메이저리그는 과연 리그 1위 팀에게 어떤 어드밴티지를 주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미국 역시 1968년까지는 1위 팀에 월드시리즈 직행 티켓을 보장해 주었다고 하지만 홈경기 어드밴티지 부분을 제외하면 시대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지금은 리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하더라도 여타 순위로 각 지구에서 올라온 팀들과 마찬가지로 디비전시리즈와 챔피언십시리즈를 모두 통과해야만 월드시리즈에 나설 수 있다.
여기에 1995년 처음 채택된 와일드카드제도의 힘을 빌어 한참 아래 순위에 자리했던 팀들이 상위 팀들을 연달아 꺾고 월드시리즈까지 올라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장면들이 잦아지자 그때마다 포스트시즌 경기제도 자체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지만, 포스트시즌의 흥행성과 비중이 정규리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진 현 시대에서 마냥 정규리그만의 가치에 몰두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 힘들게 되었다.
프로 정규리그의 관심도 유지와 흥행을 위해 1위 팀만이 아닌 기타 순위 팀들에 대한 가을잔치 티켓을 확대 배당하는 일이 필수가 되었듯이, 그로 인해 생겨나는 순위의 역전현상들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 또한 요구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하겠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