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FA 취득선수의 이적과 기록 사이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2.03.15 07: 39

구단의 선수에 대한 지명권 및 보류권을 인정하고 있는 프로스포츠 생리의 현실로부터 일정부분 선수의 권익을 보호하고, 해당 리그의 전력분산과 흥행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 할 수 있는 FA(Free agent), 일명 자유계약선수 제도가 미국에서 첫 선을 보인 것은 지금으로부터 35년 전인 1976년이다.
이 제도의 골자는 리그가 정한 일정기준 이상의 취득자격을 갖춘 선수에게 기존의 소속구단을 포함한 모든 구단과 선수계약을 새로이 맺을 수 있는 주도적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으로, 선수들에게 있어 FA는 명예뿐만 아니라 명성에 상응하는 부를 함께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한국프로야구에 이 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99년으로 도입취지는 미국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매년 겨울 FA자격 취득선수들의 진로를 놓고 벌어지는 선수와 구단간의 뜨거운 공방전은 야구팬들의 관심을 한껏 끌어 모으는 스토브리그의 백미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선수가 쏟아져 나온 이번 겨울 역시 많은 뒷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간 수많은 선수들이 이 제도를 통해 선수로서의 가치를 재 인정받을 수 있었고 팀으로서는 전력상 취약한 부분을 일거에 보완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부분 긍정적인 면모를 보여준 제도라고 할 수 있지만, 양지가 있으면 그늘도 있게 마련, 회심의 선택이 실패로 끝나버린 사례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전력판도에 별 영향을 주지 않는 기존 구단 잔류사례는 덮어두고, 개인은 물론 리그 판도를 좌지우지 할 수도 있을 대 변혁을 불러온 국내 타 구단 이적사례를 통해 주요 FA 자격선수들의 이적 후 동향을 재조명해보도록 한다.
프로야구사에서 FA를 통해 다른 구단으로 이적한 첫 사례로 기록된 선수는 1999년의 투수 이강철(해태→삼성)과 포수 김동수(LG→삼성)다.
이 중 프로야구 최초로 10년 연속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평가치를 최대한 끌어올린 상태로 둥지를 옮긴 이강철의 이적 첫 해(2000) 성적은 참담 그 자체였다. 14경기에 출전했지만 1구원승이 기록의 전부였고, 3점 대를 넘겨본 적이 없었던 방어율은 무려 7.30을 찍었다. 2000년대 초반 친정 팀 KIA로 돌아와 중간과 마무리를 오가며 제법 쏠쏠한 활약을 펼치긴 했지만 큰 기대를 품고 이강철을 잡았던 삼성으로선 씁쓸한 기억일 수밖에 없었다.
포수 김동수 역시 이적 첫 해의 성적은 기대치 이하였다. LG에서 10년간 기록한 통산타율은 2할6푼7리. 그러나 삼성으로 옷을 갈아 입은 첫 해 김동수의 시즌타율은 2할을 갓 넘긴 2할5리였다. 기존 진갑용과 함께 더블 포수 시스템의 일원으로 팀을 이끌며 2001년 삼성이 8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데 일조를 담당하기도 했지만, 김동수 역시 삼성 유니폼 안에서의 2년간 기록은 이전 대비 미미했다.
이듬해인 2000년의 대표적인 FA 이적선수는 해태에서 LG로 말을 바꿔 탄 홍현우다. LG로 가기 전, 홍현우가 11년간 해태에서 거둔 성적은 통산타율 2할8푼6리에 173홈런. 특히 그의 가장 큰 매력으로 다가온 장타력에서 홍현우는 9년 연속 두 자릿수의 홈런을 때려냈을 만큼 안정적인 파괴력을 과시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LG로 옮긴 2001년 그의 성적은 1할9푼8리의 타율에 홈런 2개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후 2004년까지 LG에 머물렀지만 끝내 그의 명예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팀이 200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그의 이름은 볼 수 없었다.
 2001년에는 LG에서 고향 팀 삼성으로 복귀한 양준혁의 이동이 가장 큰 이슈였다. 2001년 리그 수위타자 등극(타율  .355)과 9년 연속 3할과 세 자릿수 안타라는 탄탄한 배경을 안고 삼성으로 돌아온 양준혁의 복귀 첫 해(2002년) 성적은 마이너스 성장이었다. 데뷔 이후 처음으로 3할대 타율을 밑도는 2할7푼6리의 상대적으로 저조한 타율을 기록하며 10년 연속 3할 기록의 작은 꿈을 접어야 했고, 그나마 건진 것은 10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108안타)와 두 자릿수 홈런(14개)뿐.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에 그쳤지만 소속 팀 삼성이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20년 묵은 한을 깨끗이 털어내는 생애 최고의 순간을 경험할 수있었다.
2002년의 중량감 있는 무게중심 이동은 단연 포수 박경완(현대→SK)이었다. 2000년 홈런왕이자 시즌 MVP였던 박경완의 이적 첫 해(2003) 성적은 타율 2할5푼에 15홈런의 평년작 수준. 그러나 현대시절 팀을 두 차례(1998, 2000년)나 리그 정상에 올려놓는데 있어 결정적 수훈을 세웠던 그에게 SK가 기대했던 부분은 개인성적보다는 투수리드와 안정감 있는 경기운영이었고, 박경완은 이러한 팀의 바람대로 이적 첫 해(2003년) 약체로 평가 받던 팀을 한국시리즈에까지 올려 놓았다. 2004년 또 한 차례의 홈런왕에 오르는 등, 변함없는 파워를 유지한 박경완은 SK에서도 팀을 무려 세 차례(2007~2008년, 2010)년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 세우며 그의 가치를 만 천하에 다시 한번 알렸다.
2003년 스토브리그에서의 FA자격 선수 이동은 예년에 비하면 거의 태풍급이었다. 야수로는 현대의 박종호가 삼성으로, 삼성 마해영이 KIA로, 두산 정수근이 롯데로 이적했으며, 투수 쪽에서는 KIA의 마무리 진필중이 LG로, 이상목이 한화에서 롯데로 각각 둥지를 옮겨 틀었다.
그 가운데 박종호는 삼성으로 이적한 첫 해(2004) 39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수립하며 프로야구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고,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과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이라는 큰 족적을 남기며 FA 이적사에 성공적인 이적 스토리를 써넣었다.
그러나 또 한 명의 거물 FA였던 마해영은 KIA가 요구했던 장거리포 중심타자 이미지에 부합하지 못하는 11개의 홈런(타율 .281)에 그치며 다소 아쉬움을 남겼는데, 그가 이적하기 전까지 매년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팀이 느껴야 했던 상실감의 체감지수는 실제 기록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국 그는 계약기간(4년) 중 LG로 트레이드 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톱 타자 기근현상을 풀기 위해 영입한 정수근 역시 롯데의 기대와는 상당 거리가 있는 성적을 남겼다. 이적 첫 해에 그는 92경기에 출장, 타율 2할5푼7리, 24도루로 두산 시절 보여주었던 타력과 기동력을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한 채 첫 시즌을 마쳤다. 이후 격년제로 성적에서 부침현상을 보이는 등, 일관된 기량과 성적유지에 어려움을 겪던 정수근은 야구외적인 요인인 사생활적 자기관리 실패로 2008년 불명예스럽게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한편 투수 쪽에서의 실망감도 별 차이가 없었다. 이적 형태와 비중에 있어 가장 주목을 받았던 한화 15승 투수 이상목은 롯데로 옮겨온 첫 해 3승에 그치며 부산 팬들에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3점대의 준수한 방어율도 5점대로 급상승 한 것은 당연. 2006년 12승을 거두며 반짝 부활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 이상의 밝기는 끝내 발하지 못한 채 2007년을 끝으로 롯데를 떠났다.
한때 두산의 특급 마무리로 명성을 드날렸던 진필중 역시 비슷한 길을 걸었다. 2003년 KIA에서 4승 19세이브를 기록했던 진필중은 후한 대우 속에 서울 LG로 보금자리를 옮겨 화려했던 옛 영화를 재현해내고자 했지만, 이적 첫 해(2004) 15세이브와 5점대 방어율에 머물며 구단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이후에도 구위 회복 불능으로 2006년을 마지막으로 LG를 등졌다.
2004년은 FA 이적과 관련해 두고두고 많은 이야기를 남긴 해로 기억되고 있다. 그것은 바로 4년간 60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을 보장받고 현대에서 삼성으로 이적한 헤라클레스 심정수 때문이었다. 2003~2004년에 걸쳐 2년 연속 현대를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은 심정수는 이승엽의 일본진출로 생겨난 중심타선의 공백을 메우려는 삼성의 공격적인 영입에 끌려 옷을 갈아 입었다.
이적 첫 해(2005) 심정수는 28홈런에 87타점 2할7푼5리의 타율을 기록하며 삼성을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맛보게 하는 등, 나름대로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듬해 부상으로 전열에서 이탈 26경기에만 출전해 1홈런에 그치고 만 심정수는 2007년 31홈런, 101타점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하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지만, 2008년 또다시 수렁에 빠지며 22경기 출장에 3홈런으로 시즌을 마쳐 투자된 거액의 몸값에 부응하지 못하는 성적으로 야구팬들로부터 거센 혹평을 받아야 했던 선수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LG에서 SK로 자리를 옮긴 김재현은 몇 안 되는 FA 성공사례로 남아있다. 2004년 3할 타율에 14홈런을 기록했던 김재현은 이적 첫 해, 고관절 부상으로 인한 반쪽 짜리 선수라는 일각의 비평을 19홈런 타율 3할1푼5리를 기록하며 일거에 쇄신, SK 타선의 중심축으로 그만의 자리를 확고히 다져갔다. 이후 김재현은 2007년 팀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자신은 한국시리즈 MVP 자리에까지 오르는 등, 신인시절에 이은 제2의 전성기를 화려하게 구가해냈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성공시대를 연 선수가 2004년에 존재한다. 현대에서 삼성으로 심정수와 함께 동반 이적한 국민유격수 박진만이다. 이적 첫 해인 2005년 박진만의 성적은 이전 현대시절과 비교해 다소 처진 기록(타율 .249)을 보여주었지만, 삼성에서 어차피 박진만에게 기대했던 부분은 안정된 내야 수비였다. 그는 2007년 3할1푼2리의 시즌 타율로 개인 시즌 최고의 타율을 기록하는 등, 기량에서 이전과 다름없거나 오히려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며 삼성의 2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2005~2006년)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는 박진만 개인으로는 4년 연속(2003~2006년)의 한국시리즈 우승이었다.
2006년 서울 라이벌 LG의 러브 콜에 거액의 몸값을 약속 받고 팀을 옮겼던 두산의 박명환은 이적 후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해 역시 팬들로부터 수많은 비난을 한 몸에 받아야 했던 선수로 뇌리에 남아있다.
그가 LG로 이적하기 전까지 11년간 두산에서 쌓아올린 성적은 통산 88승. 이적 첫 해인 2007년 박명환은 10승 6패에 3.19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팀내 유일한 10승 투수로 자리매김했지만, 2008~2009년 연속으로 승수 ‘0’에 6~8점대의 고방어율을 기록하며 사실상 전력 외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2010년 가뭄에 콩 나듯 그럭저럭 4승을 추가하며 통산 100승 투수의 반열에 간신히 이름을 올리기는 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고, 이를 바라보는 LG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2008년을 끝으로 두산에서 롯데로 이적한 홍성흔도 FA 이적 성공사례 중의 하나로 꼽힌다. 2008년까지 10년간 2할9푼1리의 통산타율을 기록하고 있던 홍성흔은 이적 이후 3년이 흐른 지금, 그의 통산타율은 3할4리로 오히려 높아져 있다. 특히 2008~2010년 사이 3년간 리그 타격랭킹 2위자리를 3연패(?) 하는 등, 30대를 넘어선 나이에 타격에 좀더 눈을 뜬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덕 아웃 안에서 경기 분위기를 업 시키는 분위기 메이커 구실은 덤.
2008년 홍성흔 외에도 FA로 이적한 두 명의 선수가 더 있다. 히어로즈와 SK에서 각각 LG로 이사를 온 내야수 정성훈과 멀티 플레이어 이진영이다. 소속 팀 LG가 9시즌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며 지금까지는 FA로 데려온 선수들의 응집력을 바탕으로 한 내용 있는 결과를 끌어내지 못하고 있지만, 이들의 성적이 이전 소속 팀 시절과 비교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성공과 실패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할 수 있다.
2008년 이들 3명을 끝으로 FA 자격 취득 선수의 이적은 잠시 휴식기에 들어서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장황하게 살펴본 내용에 의지하자면, 거액을 들여 FA자격 선수를 잡는 것이 전력이나 성적향상에 투자한 만큼의 바로미터로 연결된 경우가 많지 않았다는 점은 법적인 족쇄와 더불어 이적이 뜸해진 하나의 이유로 볼 수 있다.
적지 않은 몸값과 팬들의 시선 그리고 새로운 구단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고 이적을 결심한 선수들이 받는 부담감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고 봐야 한다. 더욱이 성적이 기대치에 따라주지 않으면 심적인 중압감과 스트레스는 몇 배가 될 것은 뻔한 이치다.
여기에 FA자격 취득이 도래한 해에 과욕을 부려 무리라도 했다면 그 후유증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보장된 목돈으로 자칫 풀어질 수 있는 사람의 목표의식 상실과 심리적인 이완 현상도 기량 유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이나 한계를 넘어서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 FA 선수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이자 의무이다.
그간의 FA 취득선수들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단순한 가십성 이야기로만 받아들일 일은 아니다. 그 안에 작은 답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이번 시즌 무거운 기대감 속에 타 구단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선수들의 앞날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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