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잠시 정지된 듯 바람이 ‘뚝’ 소리를 내며 멈춰 섰다. 한때는 바람 차원을 넘어 태풍 급 위력으로 그라운드를 사납게 휘젓던 바람이었다. 언젠가는 멈출 바람인 것을 알았지만 그 끝은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해마다 개최되는 기록강습회를 찾아준 팬들에게 마음으로 사랑하는 야구를 잃고 싶지 않다면 야구를 직업으로, 특히 공식기록원이라는 직업은 갖지 말기를 당부(?)하곤 한다. 경험상 더도 덜도 말고 기록원 생활 1년이면 그 좋아하던 팀도, 선수도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설레는 야구, 흥분되는 야구와는 완전 안녕이다.
그러나 1993년 프로에 데뷔한 유격수 이종범의 플레이는 무덤덤해졌던 기록원의 눈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3루수와 유격수 간을 빠질듯한 깊은 타구를 빠른 발로 쫓아가 잡아낸 뒤, 그야말로 빨랫줄 같은 송구로 타자주자를 1루에서 낚아채는 모습은 희열을 넘어 짜릿한 전율로 다가오곤 했었다.

1996년 야구월간지 6월호의 표지모델로 이종범이 선택되었을 당시, 기록원이 바라보는 이종범은 어떠한 모습인지를 평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썼던 글 가운데 일부를 인용해 본다.
“플레이 하나를 풀어헤쳐 놓고 퍼즐을 맞추는 사람처럼 어떤 것이 정확한 판단일까 하는 생각으로 경기 내내 고민만 하다가 자리를 뜨게 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중략) 그런데 온몸이 따가울 정도의 전율과 함께 엄청난 고민 속으로 나를 몰아넣는 선수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보통의 유격수라면 처리가 어려웠을 타구를 쉽게 처리해 내는 듯한 이종범의 플레이로 인해 기록원들이 안타와 실책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곁들인 표현이었다.
우상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리의 성격상 냉정하고 인간미 없는(?) 공식기록원들의 마음까지도 그렇게 흔들었을 만큼 대단한 존재감을 자랑했던 이좀범, 그가 은퇴를 선언했다. 한국 야구사에 깊은 족적을 새긴 그의 기록들과 기억들을 더듬으며, 그라운드를 누비던 이종범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현실의 안타까움과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자 한다.
최고의 정점에서 선택한 새로운 도전
1993년 데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기 직전인 1997년까지 5년간 이종범은 해마다 기록적으로 엄청난 스탯을 쏟아냈다. 그 중 군복무에 관한 규정(위수지역 이탈금지)으로 홈경기에만 출장해야 했던 1995년을 제외한 4개년 치의 평균 기록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통산타율 3할 3푼 2리에 연평균 158개의 안타와 70개에 가까운 도루, 여기에 해마다 20개를 상회하는 홈런까지.
대학을 졸업하고 프로에 입문했지만 향후 은퇴할 무렵 그가 쌓아 올렸을 통산 기록의 높이를 헤아리기조차도 어려울 만큼 그는 한국야구의 특별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 짧은 기간 동안 이종범은 해태가 일군 3번의 우승에서 두 차례(1993년, 1997년)나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는 등, 우승청부사의 노릇을 단단히 수행해냈고, 시즌 경기의 절반만 출장한 1995년을 빼곤 골든글러브 유격수 부문 수상자는 언제나 그의 차지였다.
그렇게 더는 오를 나무가 없어 보였던 이종범은 1997년을 끝으로 한국을 떠나 일본 프로야구로 무대를 옮겨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미친 존재감으로 다가선 1994년
전년도 우승 팀이었던 해태는 1994년 정규리그 3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도 공동 3위였던 한화에 2패로 맥없이 주저앉으며 시즌을 접어야 했지만, 이종범 개인으로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한 해였다.
시즌 MVP에 올랐다는 사실보다 그가 이뤄낸 기록의 질과 양에서 리그 전체를 압도했을 만큼 1994년 이종범의 타격감은 한 마디로 미친 존재감이었다.
팀의 총 126경기 중 104경기를 지날 무렵인 8월말까지 이종범은 타율 4할을 지켜내고 있었다. 프로 원년(1982년) 팀 당 80경기를 치르며 기록된 백인천의 타율 4할 1푼 2리를 제외하곤, 타격의 천재로 불리던 장효조(당시 삼성)가 1987년 시즌 71경기(팀 당 108경기)를 치르던 8월 중순, 타율 4할을 유지했던 것이 가장 길게 끌었던 4할 타율이었다. 시즌 최종타율은 3할 9푼 3리(499타수 196안타). 이 기록은 유일한 4할 타자 백인천 이후 가장 4할에 근접했던 타율로 남아 있으며, 시즌 200안타 도전 역시 최 근사치 기억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다. 참고로 장효조의 1987년 최종타율은 3할 8푼 7리.
이외에도 이종범은 그 해 최다안타 1위(196안타), 최다득점 1위(113점), 최다도루 1위(84개), 최다루타 1위(290루타), 출루율 1위(.452), 장타율 2위, 타점 5위, 홈런 4위 등, 그야말로 공, 수, 주에 걸쳐 군계일학의 기량을 떨쳐 보였다.
요란한 시작의 독보적 존재
경기 개시 차임 벨이 울리자마자 톱 타자 이종범의 방망이가 바람을 갈랐다. 방망이의 중심에 맞았다 싶은 타구가 향한 곳은 외야 관중석. 투수가 어찌어찌 생각을 정리하거나 손 써볼 틈도 없이 눈 깜작 할 새에 상납(?)하고 만 홈런.
주로 팀 내 톱 타자로 활약했던 이종범이 1회초나 1회말, 공격개시와 함께 선두타자로 나서 상대 선발투수의 공을 담장 밖으로 날려보낸 횟수가 자그마치 44번이나 된다. 1회초 20번에 1회말 24번. 한화 소속이었던 좌타자 이영우가 도합 17번으로 2위에 자리한 것과 비교하면 실로 하늘과 땅 차이다.
이처럼 그는 시작부터 상대방의 기를 꺾고 들어가는 기선제압의 효과를 가장 확실하게 실천했던 타자였다. 때론 그의 한 방이 일종의 선전포고가 되어 되려 상대방의 긴장감을 살려내 역효과를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미완으로 끝난 올 라운드 포지션 출장
유격수로 프로에 데뷔한 이종범이 국내 현역생활 16년 동안 수비수로 출장하지 못해 본 포지션은 딱 하나, 마운드뿐이다.
1996년 5월 22일 광주 삼성 전에서 해태는 4-5로 뒤지던 8회말 공격에서 마지막 포수 대신 대타를 기용하는 바람에 포수가 없어 이종범을 포수로 앉혔다. 이것이 이종범 역마살 포지션의 시작이었던 셈. 이날 이종범은 9회말 자신이 동점홈런을 때려내는 바람에 연장 13회까지 무려 5이닝 동안 포수를 맡아야 했다.
일본 생활을 접고 국내로 복귀하던 2001년, 이종범은 3루수로 시작을 했다. 그리고 그 해 중견수와 좌익수를 섭렵하며 영역을 넓혔고, 이듬해인 2002년 우익수로 출장해 외야의 모든 포지션을 접수완료. 이어 2007년과 2008년에는 각각 땜질 2루수와 1루수로 등장하며 내야의 전 포지션 등기를 완료했었다. 이로써 그에게 남은 미답지는 투수 마운드 하나 뿐.
마운드에 한번 올라 모든 포지션에 서 본 최초의 선수로 기억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상대 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어서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다라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지만, 내심 그런 추억도 한번쯤 만들어보고 싶은 의향도 조금은 있어 보였는데 상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판정관을 울리고 웃겼던 그의 야구센스
경기가 꼬인다 싶었는데 이종범의 환상수비 한번에 끝이 난 적이 어디 한두 번뿐이었을까. 애매하거나 어렵다 싶은 타구를 잡아 타자주자를 잡아내는 탁월한 수비능력은 심판원이나 기록원들의 수고를 상당부분 덜어준 것은 사실이다. 특히 주자로 나가 득점이 쉽지 않은 짧은 안타에 비호처럼 홈을 파고들어 승부를 판가름 내는 그의 결정력은 가히 마하 급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역으로 판정관들이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평범한 유격수 플라이타구를 일부러 잡지 않고 땅에 떨어뜨려 땅볼로 둔갑시킨 후, 열심히 뛰지 않는 타자주자는 물론 루상의 1루 주자까지 한꺼번에 잡아내는 기지를 발휘하는 통에 엉뚱하게도 심판원이 이 상황에 엮여 곤욕을 치러야 했던 일.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상황에서 지레 아웃으로 생각했다가 이종범의 평범하지 않은 주루플레이에 시야가 현혹(?)되어 오심으로 이어진 일 등, 그의 예사롭지 않은 동작들로 인해 언제나 판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한층 더 예민한 긴장감 속에서 살아야 했다.
인간미(?)도 담겨 있던 플레이들
타자나 투수가 아닌 공,수,주의 야구기능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단 한 명을 꼽으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종범을 꼽는다. 그만큼 그의 야구센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투수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했다는 것은 단적인 하나의 반증. 그러나 그러한 이종범의 플레이에도 가끔은 인간미가 짙게 묻어났던 경우도 있었다.
한국 프로야구사의 루 공과 해프닝 리스트에 이종범의 이름이 보인다. 2006년 5월 2일 이종범은 잠실 두산 전에서 7회초 후속타자 이용규의 좌익수 깊은 플라이타구 때, 1루주자로 있다가 2루를 지나 3루로 향하다 타구가 잡히자 1루로 귀루하는 과정에서 2루를 밟지 않아 두산 유격수 손시헌의 어필에 의해 일명 ‘역주행 공과’로 아웃 된 일이 있다. 프로야구사에 기록된 몇 안 되는 역주행 공과 중 하나였다. 이외에도 일본 진출 첫 해인 1998년 3월 주니치 소속의 이종범은 시범경기에서 좌월 2루타를 치고 1루를 지나쳐 안타 대신 좌전땅볼로 처리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한편 2008년 6월에는 아웃카운트를 착각해 공을 관중석으로 던져 준 일도 있었다. 한화와의 광주 홈경기에서 우익수 이종범은 8회초 2-7로 뒤지던 1사 3루 상황에서 한화 김태균의 외야플라이를 잡아 리터치 후 홈으로 뛰기 시작한 3루주자를 향해 홈으로 던지지 않고 뒤돌아 관중석으로 집어 던졌다. 쓰리 아웃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경기가 접전도 아니고 홈으로 던졌다 해도 3루주자를 아웃 시키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인 지라 그저 웃고 넘어갈 수 있었던 해프닝이었지만, 다른 선수도 아닌 야구천재라 불리던 이종범이기에 더욱 화제로 부각되었던 기억이다.
레전드의 자격을 얻은 이종범
2011년 프로야구 30년 레전드 베스트 10 선정 당시 이종범은 후보에 이름을 올릴 수 없었다. 이유는 현역선수였기 때문이었다. 향후 프로야구 40년 또는 50년 등의 이정표가 되는 해에 다시 역대 레전드를 포지션 별로 재 정립하게 된다면 이종범은 분명 유격수 부문의 강력한 후보로 거론될 것이 분명하다. 지난해 30주년을 맞아 선정한 유격수 부문 레전드는 ‘여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김재박(현 KBO 경기운영위원)이었다.
프로 출범 이전인 1970년대 후반 혜성과 같이 등장해 기존 유격수들의 플레이와는 차원이 다른 환상수비와 강한 임팩트로 만천하에 이름을 날렸던 김재박. 이제 이종범은 선동렬과 최동원이 그랬듯 대선배이자 유격수 수비의 멘토와 다름없는 김재박과 역대 유격수 부문 최고의 자리를 놓고 팬들의 선택을 기다리게 되었다.
순수 한국무대 16년간 1708경기에 출장, 1797안타, 194홈런, 730타점, 510도루, 통산타율 2할 9푼 7리의 기록을 마침표로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된 이종범은 이제 팬들에게 어떠한 이미지로 최종 기억될까?
별도의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던 관계로 이종범의 마지막을 담을 준비를 미처 할 수 없었던 야구팬들에게 각인될 이종범의 마지막 이미지는 그래서 더욱 중요해 보인다. 앞서 말한 통산기록들과 갖가지 그에 관한 기억들이 이종범이라는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었다면 이제 팬들은 그토록 훌륭하게 여겼던 그릇이 근사하게 포장되길 바랄 것이고, 그렇게 곱게 단장되고 치장된 선수 이종범의 마지막 이미지를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하게 되기를 원할 것이다.
먼 나라의 이야기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가깝게 우리는 2010년 삼성 양준혁의 마지막 전력질주와 빗속에서 거행된 은퇴식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양준혁 개인의 영광이기도 했지만, 그를 사랑하는 팬들의 마음에도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하나의 훈장이 되어주고 있다. 소중히 그리고 오래오래 각인되고 간직되어야 할 ‘선수 이종범’, 그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팬들에게 줄 수 있는 그의 마지막 선물은 무엇일지, 은퇴시기를 고민했던 것 이상으로 고민이 필요해 보이는 시점이다.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