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없는 낙관론이 부른 女 농구의 '예고된 추락'
OSEN 김희선 기자
발행 2012.07.01 12: 48

역대 한일전 사상 최악의 참패이자 굴욕적인 패배였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았던 일본에 28점차로 패한 이날 경기는 한국 여자농구에 있어 '앙카라 참사'로 기억될 듯하다.
한국 여자농구대표팀은 1일(한국시간) 새벽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2012 런던올림픽 퀄리파잉 토너먼트(최종예선) 패자부활전 1회전에서 일본에 51-79로 참패, 탈락했다. 이날 패배로 1996 애틀랜타 올림픽부터 이어져왔던 한국 여자농구 올림픽 본선 연속 진출 기록은 4에서 멈추게 됐다.
총체적 난국이었다. 아시아의 강자로 4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뤘던 한국 여자농구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경기였다. 상대가 그 동안 한국에 일방적으로 패했던 일본이라는 점이 더욱 쓰라린 교훈을 남겼다.

일본전을 두고 어려운 경기가 될 수도 있다는 예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은 정선민 전주원 등 여자농구대표팀의 간판스타들이 모두 은퇴해 전력이 예전 같지 않았던 데 비해 한국을 꺾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했던 일본의 전력은 예상 외로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예상은 어디까지나 한국의 승리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 상대 전적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한국이 일본에 패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일본을 꺾고 나서 어디를 만나게 될지, 어디가 더 어려운 상대가 될지 분석하는 데 더 관심을 가졌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이날 생중계 해설을 맡은 정선민 SBS ESPN 해설위원은 3쿼터 후반 카메라가 비춰준 일본대표팀의 벤치 풍경을 보고 "일본이 우리와 경기를 할 때 저렇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며 착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할 말을 잃어버릴 정도의 참패였다.
이번 여자농구대표팀의 올림픽 본선 진출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은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런 식의 탈락은 예측하지 못했다. 높이에서 열세인 유럽 국가도 아니고 이제껏 한국에 이겨본 적이 거의 없었던 일본을 상대로 기록한 참패는 그 동안 한국 여자농구계에 드리워져있던 대책없는 낙관론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 잡음 속 감독 선임, 그리고 대표팀 선발
불안 요소는 감독 선임과 선수단 소집 때부터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인 대책 없이 희망적인 낙관론에 사로잡혔던 것이 문제였다. 안팎으로 불거진 잡음과 불협화음에 대해 적극적인 해명과 개선의 노력 없이 밀어붙였던 결과는 역대 한일전 사상 최악의 참패로 나타났다. 여자농구대표팀이 런던행 최종예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꾸준히 제기되었던 의문을 묵살한 결과기도 했다.
전임감독제를 채택하지 않고 있는 한국 농구계는 '리그 우승 감독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한다'는 관습을 따라왔다. 그러나 런던올림픽 최종예선을 앞두고 이례적으로 그 관습을 깨고 사령탑 교체를 단행했다. 올 시즌 통합우승팀인 신한은행의 감독이자 2009년부터 대표팀을 맡았던 임달식 감독 대신 정규리그 4위 팀인 삼성생명의 이호근 감독을 사령탑 자리에 앉혔다. 임 감독이 그동안 참가한 대회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에 변화가 필요했다는 것이 대한농구협회의 변이었다.
이 설명에 납득한 이는 사실상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히 사령탑 교체를 둘러싸고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다. 여기에 선수차출을 둘러싼 문제까지 불거졌다. 부상선수의 몸상태를 모르고 차출했다가 12명의 최종 엔트리 중 2명을 도중에 교체했다.
신한은행 소속 선수는 4명(하은주 강영숙 이연화 최윤아)이나 선발됐지만 정작 이호근 감독의 삼성생명 소속 선수는 단 한 명도 선발되지 않는 등 차출 균형 문제에 있어서도 불협화음이 일었다. 우격다짐으로 부상 중인 하은주를 엔트리에 포함시켜 터키까지 데려갔지만 단 1초도 코트에 서지 못했다.
▲ 조직력과 전술, 스피드가 사라진 한국 여자농구
이날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워보였다.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을 거쳐 제대로 휴식과 재활을 치르지 못하고 바로 예선전을 치러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불리한 조건에 놓여있는 것은 한국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이 보여준 이날 경기의 가장 큰 문제는 조직력과 전술, 그리고 스피드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당연한 일이다. 휴식도 훈련도 너무나 부족했다. 사실상 훈련기간 내내 재활에 몰두했던 하은주를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선수들이 함께 손발을 맞춰볼 수 있었던 시간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이에 비해 일본은 올림픽을 위해 합숙훈련까지 불사했다. 에이스 오가 유코를 중심으로 선수들 개개인이 하나가 된 듯 조직적인 움직임을 보이며 한국의 손발을 묶었다. 스크린 플레이부터 시작해서 내외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공수를 장악한 일본에 비해 한국의 공격은 한없이 단조로웠고 지역방어에 의존한 수비는 헛점 투성이였다. 설상가상으로 체력적인 문제가 더해진 탓인지 속공조차 자취를 감췄다.
조직력과 전술이 뒷받침되지 않자 자연히 신정자와 변연하의 공격 의존도가 높아졌다. 상대팀은 신정자와 변연하만 잘 틀어막으면 손쉽게 한국의 득점 루트를 봉쇄할 수 있었다. 이 부분을 놓칠 일본이 아니었다. 한국을 꺾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에서 활동 중인 정해일 감독을 대표팀 코치로 영입해 지옥훈련을 마다하지 않은 일본이 눈에 뻔히 보이는 방법을 외면할리가 없었다.
주포가 봉쇄당하고 수비가 번번이 무너지자 고비마다 터져주던 외곽슛도 힘을 잃었다. 일본에 크게 지고 있다는 생각에 지배당한 한국은 빨리 점수를 따라잡기 위해 외곽슛을 난사했고 공은 림을 맞고 튕겨져나올 뿐이었다. 마음이 급해지니 실책도 쏟아져나왔다. 이날 한국은 무려 23개의 턴오버를 범하며 사실상 자멸했다.
▲ 위기의 여자농구, 책임전가보다 냉정한 분석 통한 개선 필요
일본전을 앞두고 그랬듯, 5회 연속 올림픽 본선 탈락 실패, 그리고 일본전 참패라는 결과를 불러온 것은 농구계의 대책없는 낙관론일지도 모른다. FIBA 랭킹 9위라는 숫자에 안심하고 아시아 최강이라는 자부심에 얽매여서 현실의 문제점을 묵살해버린 농구계는 한국 여자농구가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어떻게든 본선행 티켓을 따오지 않을까 낙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과에 따른 향후의 대책이다. 책임을 피해보겠다고 서로에게 전가하기 급급하다면 여자농구가 맞이한 위기를 타개하는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특히 선수들에 대한 책임전가는 위기 속 여자농구를 스스로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못박는 것은 쉬운 일이다. 더 중요한 것은 왜 이런 참패를 겪고 본선 진출에 실패했는지 냉정하게 분석하고 두 번 다시 이런 결과가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개선해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신세계 쿨캣의 해체로 인해 WKBL의 파행마저 점쳐지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 여자농구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반드시 런던올림픽 본선 진출 티켓이 필요했던 상황이다. 그러나 리그 파행 사태에 이어 올림픽 본선 진출까지 실패하며 여자농구의 진정한 위기가 시작됐다. 서로 다투고 책임전가에만 힘을 기울인다면 눈 앞에 놓인 것은 공멸 뿐이다.
참패의 악몽과 이번 올림픽 본선 탈락이 지금의 잘못된 한 걸음을 바로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몸에 좋은 약이 입에 쓰다는 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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