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감동' 역경 이겨낸 4인의 부활 드라마
OSEN 윤세호 기자
발행 2012.09.15 10: 17

어느덧 사람들 머릿속에서 희미해진 이름이었다.
팀의 미래를 이끌 줄 알았던 1차 지명 투수. 저명한 메이저리그 투수코치로부터 극찬을 받았던 좌완투수. 한국야구 최고 투수의 등번호를 이어받으려 했던 파워피처. 그리고 팀 우승과 오른쪽 팔꿈치를 바꾼 에이스까지도 좌절과 방황을 겪으며 긴 시간 동안 눈물을 삼켰다.
저마다 소속팀도, 환경도 달랐지만 모두 벼랑 끝까지 몰렸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2012시즌 각자의 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선발투수로 떠올라 새로운 드라마를 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힘들 것이라 판단했지만 보는 이에게 승리 이상의 감동을 선사하고 있는, 그야말로 역경을 이겨낸 선발투수 4인을 돌아본다.

▲ 프로 10년 만에 만개하다
“야구가 안 되도 야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실전에 못나가도 꾸준히 연습했다.”
노경은(28)은 2003시즌 1차 지명으로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그리고 많은 기대 속에 1년차부터 1군 마운드를 밟았다. 그러나 프로무대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고 또 한 명의 유망주가 길을 잃고 사라질 것 같았다. 정상급 구위에도 컨트롤 불안으로 무너졌고 부상까지 겹치며 기회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군복무를 마쳤고 아픈 부위도 회복했지만 전지훈련 명단에도 제외될 만큼 도약의 시간은 찾아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1군 보다는 2군 생활이 익숙해지고 아무도 몰라보는 프로 선수가 됐지만 절대 야구공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결국 팀의 위기와 함께 반전이 찾아왔다. 2011시즌 정상급으로 평가받던 두산 불펜이 무너질 때 비로소 기회를 잡으며 일어났다. 필승조와 패전조를 가리지 않으며 연투에 나섰다. 최고 구속 150km대 직구와 140km대 슬라이더로 상대 타선을 완전히 눌렀다. 프로 9년차 만에 드디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알렸다.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올 시즌 갑작스럽게 내정된 선발 등판에서 6⅔이닝 탈삼진 10개 1실점을 기록하며 순식간에 선발진 중심에 자리했다. 지난 6일에는 데뷔 첫 완봉승까지 달성, 그야말로 거침없이 질주했고 어느덧 통산 첫 10승에 단 1승만을 남겨 놓고 있다.
▲꿈꾸던 잠실 마운드에서 날다
“다시 잠실 마운드에 오른다면 무슨 기분이 들지 상상도 못하겠다.”
전지훈련 기간 레오 마조니의 극찬. 2006년 8월 11일 잠실 한화전 1실점 완투승.
얼마 전까지만 해도 LG 좌완투수 신재웅(30)에 대한 기억은 2006년 겨울과 여름에 일어난 두 가지 일이 전부였다. 2005년 LG에 입단한 신재웅은 2007시즌을 앞두고 FA 보상선수로 두산으로 이적, 시즌이 끝나고는 어깨 부상으로 방출됐다. 곧바로 군복무에 임하면서 입단 후 3년 만에 프로야구 선수 명단에서 사라졌다. 프로선수에겐 그야말로 사형선고였다.
희망은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됐다. 방출 후 LG 차명석 투수코치로부터 “야구를 포기하지 말고 다시 마운드를 밟기 위해 꾸준히 웨이트 트레이닝에 임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는 도전이었지만 다시 잠실 마운드에 오를 날을 고대하며 차 코치의 주문을 그대로 따랐다. 결국 전역 후 2011년 신고 선수, 2012시즌을 앞두고 1군 무대서 뛸 수 있는 등록선수로 다시 LG 유니폼을 입었다.
7월 26일. 꿈에도 그리던 잠실 마운드를 선발투수로서 다시 밟았다. 그리고 2148일 만에 선발승을 따냈고 곧바로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했다. 기복은 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많은 이닝을 소화하며 보다 공격적으로 타자와 맞서고 있다. 어느덧 4승. 후반기 팀 내 최다 선발승을 기록하며 선발 등판한 8경기에서 평균자책점 2.88을 올리고 있다.
▲방황 끝에 마침내 부활하다
“집에서 유니폼을 챙기는 데 기분이 좋았다. 제 2의 전성기를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김진우(29)는 한국야구 역사상 손꼽히는 특급 유망주였다. 타이거즈 프랜차이즈의 새로운 전성기를 개척할 투수라는 평가 속에 등번호 18번을 달아주려고도 했다. 2002년 당시 최고액인 계약금 7억으로 KIA 유니폼을 입었고 프로 데뷔 첫 해부터 탈삼진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이 반복됐다. 데뷔 후 2년차까지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을 거뒀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팀에 보탬이 됐지만 리그 정복은커녕 팀의 에이스 투수로 삼기에도 부족한 활약이었다. 심지어 그라운드 밖에서 사적인 문제가 꾸준히 일어났고 급기야 2007년 7월 11일에는 2군 무단이탈이라는 최악의 길을 걸었다. KIA는 20일 후 김진우를 임의 탈퇴 공시했고 방황은 2010년 여름까지 4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래도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야구공 뿐이었다. KIA 팀에 저지른 원죄를 씻기 위해 일본 독립구단, 경찰청 등에서 체중 감량과 훈련에 매진했다. 2010년 8월 29일 긴 방황 끝에 팀에 정식 복귀, 2011년 6월 17일에 비로소 1군 무대에 합류해 1446일 만에 유니폼을 챙기고 광주 무등구장으로 향했다.
부활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프로 초창기 구위를 되찾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올 시즌 선발진에 합류했다. 결국 5월 9일 대전 한화전에서 1791일 만에 선발승에 성공, 제 2의 전성기를 열었다. 2012시즌 김진우는 20경기에 나서며 8승 4패 평균자책점 3.35를 기록, 6년 만에 두 자릿수 승에 도전 중이다.
▲푸른 피의 에이스 7년만에 돌아오다
“너무 안 좋았다. 전력으로 던졌는데 128km가 나왔다. 그냥 포기하려고도 했었다.”
   
의심의 여지없는 삼성의 1선발 에이스 투수였다. 2000년 배영수는 고졸 신인으로 삼성에 1차 지명, 2년차부터 13승을 거뒀고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연평균 12승을 올리며 마운드를 지켰다. 특히 2004시즌에는 17승 2패 평균자책점 2.61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다승 1위, 승률 1위. 탈삼진 1위를 차지하며 MVP의 영예도 누렸다.     
하지만 영광의 순간 뒤에는 긴 터널이 기다리고 있었다.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오른쪽 팔꿈치와 팀 우승을 바꿨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팔꿈치 수술 후 1년의 재활을 거쳐 2008시즌 1군 무대에 돌아왔지만 잃어버린 구위는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급기야 2009년에는 1승 12패 평균자책점 7.26으로 최다패 투수가 됐다. 배영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정말 해도 해도 안 됐다. 온 힘을 다해 던졌는데 128km가 나오더라. 이민까지도 고려했었다”고 회상했다. 에이스 투수에서 선발 로테이션 한 자리를 겨우 지키는 평범한 투수가 되고 만 것이다.
이전 기량을 회복할 것이란 기대는 점점 작아만 졌고 어느덧 팀의 주요 전력에서 배영수의 이름은 빠졌다. 그래도 부활하기 위해 모든 일을 다 했다. 체중을 늘려보기도 하고 투구폼을 바꿔 보기도 했다. 때로는 연습량을 많이 했고, 때로는 연습량을 적게 해봤다. 올 시즌을 준비하는 과정에선 전성기의 때의 체중을 되찾기로 다짐하고 다시 감량에 임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을 알렸다.
구속을 140km 중반대까지 끌어올렸고 슬라이더의 각도도 전성기에 가까워지며 타자들의 배트를 춤추게 만들었다. 제구력은 오히려 더 예리해지면서 상대 타자들의 몸쪽을 향한 직구를 거침없이 구사하고 있다. 올 시즌 첫 번째 등판부터 7이닝 무실점으로 선발승에 성공, 가벼운 발걸음과 함께 순항했다. 그리고 8월 26일 잠실 LG전에서 10승에 도달, 7년 만에 두 자릿수 승을 기록한 것과 동시에 통산 100승·통산 1000탈삼진까지 달성했다. 이렇게 배영수는 ‘인간승리’와 함께 다시 삼성 마운드의 축으로 올라섰다.
drjose7@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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