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포스트시즌 개막을 알리는 두산과 롯데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잠실) 선발오더가 경기개시 1시간 전 그라운드에서 교환되고 난 뒤, 이를 받아 든 관계자들의 눈가엔 작은 놀라움이 일었다. 롯데의 1번타순에 시즌 내내 톱타자 노릇을 담당했던 김주찬이나 전준우가 아닌 손아섭이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올 시즌 두산을 상대로 한 손아섭의 타율은 2할1푼7리였다. 158안타로 최다안타 부문 타이틀을 거머쥔 손아섭의 정규리그 타율 3할1푼4리(리그 3위)에 비하면 한 마디로 초라한 성적. 여기에 두산 선발이었던 니퍼트와의 상대전적은 더욱 낮은 1할8푼8리(16타수 3안타)로 기록상 강점을 찾기 힘든 선택이었다.
그러나 4회초 우익선상 2루타로 3-0으로 달아나는 추가 타점을 올리고 연장 10회초에는 기습성 스퀴즈번트로 3루주자를 불러들이는 등, 손아섭을 택한 양승호 감독의 카드는 나름대로 성공적인 결실로 이어졌고, 그에 힘입어 롯데는 가장 중요한 1차전을 승리로 장식할 수 있었다.

그후 양승호 감독이 남은 경기에서도 같은 카드를 쓰려고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차전 경기 중 바운드 된 송구에 얼굴을 맞아 전열에서 완전 이탈하게 된 포수 강민호의 돌발부상에 일정 수준의 타순조정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롯데는 2차전 이후 김주찬을 1번타자로 고정하며 종래의 정상적인 타순으로 돌아와야 했다.
우리는 과거 포스트시즌 역사에서 난조에 빠져 제 구실을 해내지 못하고 있는 팀의 중심선수들을 감독이 믿고 끝까지 기용, 고정된 타순을 고집하던 예를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1999년 정규리그 승률 1위팀이었음에도 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4연패를 당하며 맥없이 주저 앉았던 두산의 김인식 감독은 시리즈 내내 부진을 보였던 4, 5번 김동주와 심정수(각각 15타수 3안타)의 타순을 끝까지 고집했고, 2001년 정규리그 1위팀인 삼성을 4승 2패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던 한국시리즈에서도 김인식 감독은 1~6차전 내내 1번부터 7번타순을 고정적으로 유지했다.
김 감독의 믿음 야구는 그것이 다가 아니다. 두산에서 한화로 적을 옮긴 이후인 2005년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에서도 김인식 감독은 두 차례의 시리즈 내내 극도의 타격침체를 보인 4번타자 김태균(각각 17타수 1안타, 11타수 1안타)의 타순을 두산에 무릎을 꿇으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는 최종순간까지 주변의 따가운 입방아에 흔들림 없이 귀를 닫았었다.
2연승 후 3연패의 역(逆)스윕 포함,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 1라운드인 준플레이오프에서 눈물을 쏟았던 롯데 제리 로이스터 감독도 선수기용에 대한 신념은 바위처럼 굳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1999년 이래 롯데를 8년 만에 가을야구에 서게 만든 로이스터 감독은 2008년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에서 제대로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3연패를 당하는 동안, 각각 12타수 2안타, 14타수 2안타에 그친 3번 조성환과 5번 가르시아의 타선 중심배치에 변화를 주지 않았다.
또한 2009년과 2010년 두산과의 두 차례에 걸친 준플레이오프에서도 로이스터 감독은 2009년 5, 6번 타순에 박아 놓은 가르시아와 홍성흔이 나란히 16타수 3안타, 15타수 3안타의 빈타에 허덕였을 때에도, 2010년 2번 손아섭(14타수 3안타), 5번 홍성흔(21타수 3안타), 6번 가르시아(20타수 4안타)가 타선에 힘을 실어주지 못하고 있었을 때에도 이들을 포함한 전반적인 선수기용에 있어 믿음을 전제로 상당부분 보수적인 주관을 줄곧 고수했다.
물론 그러한 다소 탄력적이지 못한 위기상황 대처능력에 발목이 잡혀 3년 연속 팀을 가을무대에 서게 한 혁혁한 전과에도 불구하고 재계약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로이스터 감독의 사례는 포스트시즌사에 있어 또 하나의 믿음야구로 기억되고 있다.
롯데가 4차전에서 천신만고 끝에 두산을 꺾고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 짓던 날 양승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앞으로는 선수들을 믿지 말아야겠다”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흘렸다. 농담조의 말 표면은 거칠었지만 안에 담긴 본질은 선수들에 대한 배려의 필요성을 지적한 말이었다.
선수들 스스로가 알아서 해주는 것이 최상의 길이지만, 무턱대고 선수에게만 상황을 맡겨두는 것은 오히려 선수의 부담을 가중시키게 되고, 그로 인해 더욱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라는 악순환의 부작용을 걱정하는 말이었다.
부연하자면 3-0으로 앞선 1차전 5회말에 거듭된 수비실수로 상대에 추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1-1로 맞서던 2차전 7회 초 1사 만루에서 병살타를 기록한 데 이어 3차전에서는 0-3으로 뒤지던 1회말 3루주자로 나가 있다가 후속타자의 외야플라이 때 리터치 플레이를 제대로 하지 못해 홈에서 승부도 걸어보지 못한 채 허무하게 태그아웃 되는 등, 공-수-주 모두에서 경력에 걸맞지 않는 난조성 플레이를 거듭한 조성환과 0-2로 끌려가던 4차전 4회말 무사 1, 2루에서 사인미스로 주자들을 진루시키지 못하고 삼진으로 물러난 박종윤 등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무거운 죄책감을 코칭스탭이 덜어줄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봐야겠다라는 취지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일 조성환의 결장을 예상할 때에도 양승호 감독은 마지막 4차전까지 조성환을 줄곧 2번타순에 배치하며 스스로 난관을 헤쳐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4차전에서 양감독은 조성환과 박종윤을 비교적 이른 시점인 3회와 5회에 경기에서 빼내는 강수(?)를 뒀다. 문책성임을 시사하는 바도 있지만 전폭적인 믿음의 야구가 선수를 오히려 더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음을 염려한 조치였던 것이다.
2승 3패로 석패한 지난해 SK와의 2011 플레이오프 5차전 내내 롯데 양승호 감독은 1~9번까지의 선발오더(김주찬-손아섭-전준우-이대호-홍성흔-강민호-황재균-조성환-문규현)를 단 한 경기도 달리 한 적이 없었다.
스타팅 멤버와 백업 급의 기량차가 비교적 확연한 점도 영향을 미쳤지만 중심타선에 포진한 이대호(18타수 4안타)와 강민호(17타수 4안타), 황재균(19타수 2안타) 등의 동반부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정타순을 묵묵히 지켰다. 또한 주축타자에게 병살타는 있어도 보내기 번트란 없었다. 그것이 양승호 감독의 믿음야구였다.
그런데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이대호의 공백으로 지난해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량감이 떨어진 타선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경기를 풀어가는데 있어 보다 과감한 선수교체와 작전구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두산에 이은 두 번째 설욕상대인 SK와의 플레이오프 리턴 매치를 맞아 롯데 양승호 감독은 어떠한 용병술과 작전을 선택하고 구사해 갈 것인지. 경기시작 날짜마저 지난해와 똑같은 10월 16일. 1차전을 필두로 쓰여질 SK와 롯데의 플레이오프를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일 수 있겠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