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연기는 여전했고, 불혹을 한참 넘긴 나이에도 빼어난 미모는 변함이 없었다.
데뷔 30년차를 맞은 배우 채시라는 여전히 정상에 있었다. SBS 주말드라마 ‘다섯손가락’(극본 김순옥, 연출 최영훈)에서 비정한 모성(母性)을 보인 전직 톱피아니스트 채영랑으로 분한 채시라는 다소 극단적인 극의 전개에도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극을 중심에서 이끌며 작품을 지탱했다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드라마 종영 이후 만난 채시라는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끝나서 개운하고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다섯손가락’을 마친 소감을 밝혔다. 오랜 작품 출연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담담함일까, 어깨가 으쓱할 만한 평가를 받았음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노련한 베테랑 연기자의 오라가 풍겨졌다.

◆ 상상했던 것보다 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손가락’에서 채시라가 연기한 채영랑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누명, 매수, 살인교사도 마다치 않는 극단적인 모습으로 자기 새끼를 보호하는 마치 동물과도 같은 모성의 소유자였다. 극 말미 모든 악행이 실은 자기 자식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속죄하지만, 이러한 인물을 이해하여 설득력 있게 연기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힘들긴 하죠. 하지만 일 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확실히 쉬운 역할보다는 굴곡 있는 캐릭터에요. 제가 영랑같은 배역을 맡게 된 건 아마 인물의 그런 모습이 저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일 거예요. 제 필모그래피를 보면 강한 캐릭터가 많은데 애써 그런 배역을 택하는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출연한 작품 중에 대작이 많았고 또 연출자들께서도 저의 강렬한 모습을 많이 원하셨어요. 이번 ‘다섯손가락’ 역시 김순옥 작가님과 최영훈 PD의 적극적인 러브콜에 출연을 결심했어요.”
카리스마에 대한 요구는 채시라 본인과 제작진의 생각이 동일했지만, 이번 ‘다섯손가락’의 경우 당초 기획 보다 극의 전개가 훨씬 더 극단적으로 치달은 것만은 분명하다. 제작진이 채시라에게 러브콜을 보냈을 당시 영랑 캐릭터가 이렇듯 비정한 모성을 띌지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 얘기했던 것 보다 세게 간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야기가 바뀌었다고 해서 중간에 ‘나 이거 못해’ 할 수는 없는 일이에요. 최대한 인물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했고, 그런 건 극을 이끄는 주인공으로서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했어요. 극단적 변화에 물론 힘들었어요. 하지만 피할 수 없다면 헤쳐 나가야 하고, 더 나가서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해야 했어요. 다행인 건 저희 팀이 베스트들만 모여서 각자 자기가 맡은 역할을 끝까지 잘 해낸 점이에요.”
영랑을 이해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채시라는 오히려 그녀의 인생과 극단적인 선택이 “안쓰럽게 느껴졌다”고 했다. “악역이라고 생각했는데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는 게 채시라가 받아들이기로 한 영랑의 황량한 내면이었다.
“자기 자식을 보호하려는 영랑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고 하는데 누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다만 내 자식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호(주지훈)에게 하는 행동이 쉽게 말하는 ‘나쁜짓’인데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 고민이 생기는 거죠. 나 같으면 못할 테지만 영랑이라면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영랑의 그런 행동의 배경에는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시집에서 구박당해 탈출구가 아들밖에 없었다는 게 작용해요. 아마 영랑이 남편과 사이가 좋았다면 그렇게까지 변하진 않았을 거예요.”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지만 채시라는 악역을 연기하며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했음을 내비쳤다.
“영랑을 악역이라고 하시는 분도 계시지만 드라마 ‘해신’ 때 자미부인 캐릭터는 이 보다 훨씬 더 했어요. 다만 매력적인 악역이었죠. 저는 악역에 대한 선입견은 없는 편이에요. 대신 이번 ‘다섯손가락’을 하면서 재벌가 며느리 역할을 맡은 만큼 화려한 패션을 보여줄 수 있었던 점이 즐거웠어요. 비주얼적인 면에서 볼거리를 제공하고 또 그런 점이 화제를 만든 게 저한테는 재밌는 작업이었어요.”
◆ 자기 관리, 데뷔 30년 롱런의 비결

마흔다섯 살의 나이에도 고운 외모와 군살 하나 없는 몸매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은 꾸준한 노력이었다. 연기에 있어 자기 배역에 철저하게 몰입하는 것만큼 채시라는 외모를 관리하는 데도 꾸준한 공을 들였고, 이는 ‘다섯손가락’에서 아들로 출연한 배우 주지훈과 모자(母子) 사이가 아닌 연인관계 같다는 웃지 못 할 해프닝을 만들기도 했다.
“운동을 안 좋아했어요. 그러다 드라마 ‘천추태후’를 끝내고 어머니께서 ‘탄력 있게 늙어가자’며 권유하셔서 운동을 시작했는데 몸이 확실히 다른 거예요. 저는 운동은 살을 뺄 때 하는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어요. 그런데 운동으로 모든 면에서 활력이 넘치는 걸 경험하고 나서는 바빠도 운동시간을 사수하게 되더라고요. ‘인수대비’ 할 때도 1주일에 한 번은 꼭 운동하러 다닐 정도였어요.”
이 밖에도 채시라는 피부 관리를 위해 ‘다섯손가락’의 생방송 촬영 일정에도 이틀에 한 번은 꼭 얼굴에 팩을 하며 피부를 관리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얼굴로 다 드러나기 때문”에 잠을 포기하면서까지 놓지 않았던 자기 관리의 일종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현대물의 액션신을 소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천추태후’도 그런 면에서 시작한건데 활 쏘고 말 타는 연기를 하는 게 즐거웠어요. 힘들어 죽겠는 건 맞는데 저는 좀 도전적인 성향을 가진 것 같아요.”
◆ 자식교육? 늘 부족함을 느낀다

채시라는 지난 2000년 당시 가수로 활동하던 김태욱과 결혼해 현재 1남1녀를 슬하에 두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촬영장을 휘젓는 채시라도 집에만 가면 열두 살 딸과 여섯 살 아들과 전쟁을 치르는 평범한 엄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모든 엄마들이 그렇겠지만 무서울 땐 무섭고 져줄 때는 마냥 져줘요. 나름대로는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사용하며 아이들을 양육하는데 매번 부족함을 느껴요. 이땐 이렇게 할 걸, 저땐 저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죠.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운다고 하던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런 생각을 더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남편은 사업가로 진로를 변경했지만 가수로 활동했고, 채시라 본인은 현재에도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로 불리는 만큼 아이들에게도 부모의 이러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닐까. 채시라는 “아이들이 아직 어려서 연예활동에 대한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며 “특별히 재능이 있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연예활동은 안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JTBC 사극 ‘인수대비’와 이번 ‘다섯손가락’까지 지난해부터 시작된 채시라의 연기 활동은 불같은 엔진을 뿜어내다 최근에야 비로소 휴지기를 맞았다. 60부작 ‘인수대비’와 30부로 종영된 ‘다섯손가락’까지 강한 캐릭터로 무장하고 쉴 새 없이 달려온 만큼 당분간은 휴식을 취한다는 게 채시라의 계획이다.
“일년에 작품 두 편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 ‘인수대비’와 ‘다섯손가락’의 경우 시기적으로 맞물리게 된 건데 실제적으로 분량이 엄청났죠. 당분간은 열심히 쉬다 다시 작품을 하고 싶어요. ‘다섯손가락’에서 원 없이 울었으니 밝은 코믹물을 해도 좋을 것 같아요. 다만 코믹한 연기가 겉으로는 쉬워 보일지 몰라도 엄청난 계산과 감각이 필요하기 때문에 결코 쉽진 않을 거예요.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과 또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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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