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시마의 커피헌팅] 나는 왜 커피를 하게 되었는가
OSEN 손용호 기자
발행 2012.12.11 11: 36

OSEN은  '커피계의 인디애나 존스'로 불리는 세계적인 커피 전문가 가와시마 요시아키 씨의 커피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맛 좋고 품질 좋은 커피를 찾아 세계 곳곳을 누빈 그가 현장에서 터득한 커피에 얽힌 재미 있는 이야기들을 이 코너를 통해 풀어낼 예정입니다. 커피를 즐기는 애호가들과 커피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정서적·지적 욕구를 채워줄 유익한 정보들이 따사라운 창가의 기운 좋은 햇살처럼 독자들의 마음을 파고 들 것입니다. 이번주는 가와시마 씨가 커피헌터로 발을 내딛게 된 과정을, 다음주 부터는 그 유명한 부르봉 커피를 부활시키는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편집자주]
필자는 녹차산지로 유명한 시즈오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이곳에서 커피배전회사를 운영했다. 아버지는 커피 볶는 작업(배전)이 좋아서 커피를 하게 된 분으로 언제나 커피에 말을 걸며 배전하는 모습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배전중인 아버지는 온통 커피에 빠져 있어서 가까이 갈 수도, 말을 걸 수도 조차 어려운 기운을 품어냈다. 

아버지가 커피배전을 시작한 것은 1953년, 내가 태어나기 3년 전이었다. 원래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측량사로서 현청 토목과에 근무했다. 커피가 너무 좋아 커피숍 투어로 시작된 아버지의 커피인생은 생두를 구입하여 당신이 직접 배전을 하는 걸로 시작하더니, 아예 주말 근무가 끝나면 야간열차를 타고 오사카까지 가서 배전을 배우다 월요일 아침에 시즈오카 역에서 바로 근무지로 출근하는 생활을 3년간 계속 하다 결국 독립했다. 
현재 전세계에서 네 번째로 커피를 많이 소비하는 나라가 일본이지만, 그 때는 아직 기호식품으로서도 소비량이 적고 간단히 접하기도 쉽지 않아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는 지 대단하게 여겨진다.
어렸을 때 나의 놀이터는, 세계 각지에서 도착한 마대자루가 산처럼 쌓여있는 생두 창고였다. 마대자루는 나라별로 디자인도 다르고 글씨도 달라서 어린 나에게는 너무나 신기했다. 더운 여름철에는 어둑어둑한 창고의 선선한 마대자루 위에 누워서 헌 책방에서 빌려 온 만화를 읽고 놀기도 했다.
그러다 지치면 창고 구석에 있는 작은 방에 들어가서, 파트타임 아주머니들이 하던 ‘죽은 콩’을 골라내는 작업을 거들었다. 죽은 콩이라는 말, 모르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 당시 수입된 커피는 작은 돌, 못, 나무파편 등이 많이 혼입되어 있었고, 맛을 나쁘게 하는 죽은 콩(결점두)이 많이 들어 있었다. 중량으로 거래되던 커피는 국제시장가격이 올라가면 혼합물도 증가했고, 내용물도 못에서 철근이 되거나 심할 경우에는 맥주병도 들어있을 때도 있어서 아버지가 어이없어하며 나에게 보여주셨던 적도 있었다.
혼합물은 배전하기 전에 대부분 걸러내지만, 미숙두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미숙두는 배전을 해도 갈색으로 변하지 않고, 이것이 잡맛이나 쌉싸름함의 원인이 된다. 그래서 파트타임 아주머니들이 한 톨 한 톨 손으로 골라내야 했다. 숙련된 아주머니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은 손놀림으로 콩을 선별해 갔다. 나는 그저 재미있어서 이를 도왔던 것뿐이지만, 이 때의 경험이 콩을 선별하는 눈을 키우고 지금 하는 일에 너무나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창고에서 놀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커피가 재배되는 나라에 가보고 싶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진득하게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커피 하면 브라질이라 생각한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도쿄에 있는 브라질 대사관에 편지를 썼다.
‘시즈오카에 사는 커피집 아들인데, 브라질에 가서 커피농장에서 일하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지만 답장은 없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고 또 다시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왔다. 그러나 ‘일본 정부에 물어 보라’ 라는 차가운 내용이었다. 장남인 나에게 가업으로 물려줄 생각을 하고 있던 아버지는 이 편지를 발견하고 노발대발 했다. 그러나 나는 가업으로 배전업을 물려받으려면 커피를 재배하고 있는 나라에 가 봐야 한다고 간곡하면서 강하게 호소했다. 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면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3년 후에는 어느 샌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라는 조건으로 바뀌어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산지에 대한 동경은 커져만 갔고, 음악도 라틴 음악만 듣고 있었다. 한편, 부모님은 내가 일본의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큰 커피회사에서 공부를 한 후, 가업을 이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고등학교 2학년인 1973년, 행운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일본의 배전업자가 참가하는 중미 커피 미션의 멤버로 중미국가들을 시찰했고, 그 때 들렀던 멕시코의 대학이 맘에 든 아버지는 귀국하자 마자 나에게 ‘어차피 너는 일본 대학에 입학해도 좋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고, 공부도 안하고 놀기만 할 테니까, 멕시코로 유학을 가면 어떻겠냐. 그렇게 가고 싶은 커피산지이며 게다가 환경도 좋은 대학이니 좀더 차분하게 공부를 할 수 있겠지. 그리고 졸업하고 돌아와서 가업을 잇도록 해라’고 제안을 했다. 
드디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좋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집안은 멕시코에 아무 연고가 없었다. 중남미에서 유일한 커넥션은 아버지의 지인인 주일 엘살바도르 대사 뿐이었기 때문에 상담을 위해 아버지와 둘이서 도쿄에 있는 대사관을 방문했다.
끝까지 설명을 듣기도 전에 베네케 대사는 ‘왜 멕시코에 가느냐. 우리나라로 유학을 가라. 대학도 내가 정해줄테니, 우리 누나 집에서 홈스테이를 해라’고 환하게 웃으며 제안했다. 순식간에 엘살바도르 유학이 결정된 순간이었다. 베네케 대사와의 만남이 나의 커피헌터로서의 첫 발이 되었으며, 28년간 산지를 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게 할 것이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가와시마 요시아키 osenlife@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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