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침데기 소녀에서 청순한 여인으로 억척스런 아줌마에서 지적이고 도도한 재벌가 여인까지. 꼽아보면 오연수는 89년 데뷔 이후 24년간 다양한 모습으로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냈다. 늘4,5개월에 한 번씩 작품을 해 1년 이상을 쉬어본 적이 없다는 그는 꾸준하고 성실한 워커홀릭이었다. 그렇다고 일만 한 것도 아니다. 한 남자를 만나 6년간 사랑을 하고, 결혼해 두 명의 자녀를 낳고 살아가는,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 역시 알차고 성실하게 꾸려왔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배우의 길을 달려온 그지만 유독 영화와는 인연이 멀었다. 지난 6일 개봉한 '남쪽으로 튀어'가 15년 만에 선택한 첫 영화인 것. 작품이 좋으면 스케줄이 안 되고 이런 저런 상황으로 좀처럼 선택하지 않았던 영화였다. 그런 그를 스크린으로 돌아오게 한 '남쪽으로 튀어'(감독 임순례)가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언론배급시사회 때 편집된 영화를 처음 봤다는 그에게서 솔직한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는 있는 것 같아요. 그 전에 세 시간 반짜리, 편집 안 된 거 봤는데. 음악도 안 깔리고 정말 영화만 있는 거였는데 그건 누가 봐도 지루했어요. 그거에 비하면 나았어요. 제가 찍은 거니까 너무 재밌다 하기도 그렇고 '너무 재미있지 않아요' 이렇게 말할 수도 없는데, 지루하지는 않았어요. 사실 좀 아쉬운 마음은 있어요. 장르가 좀 불분명해 보이는 것 같긴 해요. 코미디 장르라고 말하기엔 어렵지만, 웃기려고 한 게 아닌데도 웃기는 장면들이 많은 것 같아 재미있어요"

오연수는 극 중 운동권 출신 아나키스트 남편인 최해갑(김윤석 분)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주는 부인 안봉희 역을 맡았다. 국민임을 거부한 채 영화를 찍는답시고 며칠은 집을 비우고, 툭하면 공무원들과 싸워 경찰서에 잡혀가는 남편이 미울 만도 한데 안봉희는 묵묵히 그의 곁에서 무한한 지지를 보낸다. 어떻게 보면 답답하기도 한 캐릭터. 극 중 가장 좋았던 장면을 얘기하다 보니 안봉희 캐릭터가 선보이는 가장 극적인 장면인 화염병 신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극 중 안봉희는 남편을 돕기 위해 화염병을 만들어 던진다.)
"원래 대학교 때 학생운동 했던 여자에요. 오랜만에 (화염병 던지기를) 해요. 항상 아내로 엄마로 살지만 그 안에는 그런 생각을 갖는 사람이라 남편을 지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옛날 그 느낌 나온 거죠. 사실 그 신이 없으면 이 작품 선택 안했어요. 나름대로 안봉희가 자기의 색을 표현하는 신이 있어서 (영화를)하게 됐어요. 그게 아니면 어느 누가 해도 되는 역할인 것 같아요. 감정 표현 없고 그런 인물이니까요. 오버하지 않고 그 선을 유지하는 여자죠"
사실 영화는 촬영 중간 한 차례 갈등을 겪었다. 함께 하는 배우로서 기분은 어땠는지, 당시의 상황을 조심스레 물어봤다. 역시 망설임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워낙 상황이 열악했기 때문에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예민해 있었던 시기였어요. 어디에 갇혀서 촬영해야 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것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으니까 촬영이 힘들었죠. 다들 불쾌지수가 쌓이고 높아진 상태에서 의견충돌이 일어났어요. 다 영화가 잘 되기 위해서 그런 건데...너무 보도가 됐어요. 다신 안 볼 사람처럼 그런 건 아니었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의견이 안 맞았던 것뿐이에요. 저는 그냥...아무 말 없이 지켜만 봤죠(웃음)"
영화 속에서 오연수는 부부로 출연하는 김윤석과 의외로 멋진 조합을 선보였다. 다소 카리스마가 넘쳐 보이는 김윤석과의 호흡은 어땠을까.
"워낙 영화에 대한 열의나 열정이 강한 분인 것 같아요. 욕심이 많고 이 작품이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갖고 계신 분이요. 연기에 대한 애정이나 이런 면에서 배울 점 많고 호흡도 잘 맞았어요. 연기 잘하는 분이랑 하는 게 좋아요. 상승효과 같은 게 있어요. 저 사람이 저런 준비를 했구나 나도 다음엔 잘 해야지, 이런 경쟁심이 생기면서 나도 이렇게 해야겠단 생각이 들죠. 그런 것에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는 영화를 촬영하며 8kg 정도를 증량했다. 너무 말랐다는 감독의 한 마디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진해서 살을 찌웠다는 게 그의 설명.
"'왜 이렇게 말랐어요' 감독님이 말 하셨는데, 살을 찌우라는 건 아니었지만, 맘에 걸렸어요. 또 안봉희 자체가 엄마고 아내니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꾸미지 않고, 안 예뻐 보였으면 좋겠다, 연기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자연스럽고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흔한 느낌의 여자가 돼야겠다고 생각 했어요. 실제로도 섬에서 촬영하면서 화장은 해본 적도 없고, 머리도 그냥 묶고 촬영장 5분 거리 숙소에서 자다가 가서 찍고, 중간에 누워서 쉬다가 찍고 그랬어요. 그게 반응이 좋더라고요. 아는 언니는 '너무 좋았다. 엄마 같고, 마른 몸으로 안봉희 했으면 안 좋아 보였을 텐데 살 냄새가 났다'고 말해줘 좋았어요. 내가 이렇게까지 쪄도 될까 싶고 옷도 맞는 게 없을 정도였지만 잘 찌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직 다는 안 뺐는데, 여기서 멈추려고요. 나이가 드니 볼 살이 빠져요. 그건 아닌 것 같아서 4kg만 뺐어요"

데뷔한 이래 그는 다양한 역할을 맡아 왔다. 최근 생긴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는 차갑고 도도한 '도시 여자' 이미지다. 차도녀 이미지에 대해 말을 꺼냈더니 드라마 '달콤한 인생'(2008), '나쁜 남자'(2010)의 영향이 컸다며 원래는 그렇지 않다고 손사래를 쳤다.
"데뷔할 때부터 그런 역할을 한 적이 없어요. 요 근래에 몇 작품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생겼는데. 그 전에는 듣고 싶어도 못 들었어요. 고전적이다, 얌전해 보인다, 이런 얘기만 줄곧 들어왔으니 '난 언제 도시적이라는 말을 들어보지?' 이런 생각까지 한 적 있다니까요. 한복만 입을 것 같은 이미지에 불만도 있었고. 사실 임순례 감독님도 안봉희 역할 미팅을 할 때 '너무 도시적이라 안 맞는 거 아닌가'하고 생각하셨대요. 그럴 수 있어요. 절 모르시면. 그런데 '힐링캠프'를 보고 캐스팅 하셨대요. 당시 대표 분이 '힐링캠프' 보시라고, 전혀 도시적이지 않다고 말씀 드렸다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실제로 만난 오연수는 고전적이고 참한 스타일의 여성도 차도녀도 아니었다. 솔직하고 털털한 매력으로 가득 차 있었고, 뭐 하나 숨기는 법이 없었다.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비법도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단순하게 사는 데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저는 생각을 깊이 하지 않아요. 뭔가를 고민하거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성격이 아니라 서요. 몇 날 며칠 고민하면서 그것만 생각하지 않고 잠깐 생각하고 말아버려요.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하면서 즐겁게 하려고 하는 편이에요. 사실 20대 때는 뭐에 많이 얽매였어요. 스물여덟에 결혼하기 전까지는 항상 '내가 왜 일을 해야 하지?', '이렇게 돈을 벌어 뭐하지?'하는 생각들 때문에 즐겁게 일을 한 적이 없어요. 아마 가정의 유일한 수입원이 저여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항상 그냥 일 하는 걸로 시간을 때우고.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서 이러면 안 되겠다 생각 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스트레스 받고 짜증내면 나만 힘들더라고요"
이야기는 자연스레 결혼과 가정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분위기는 더 활기차졌다. 영화를 본 아이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최고였다. 엄마를 너무나 자랑스러워했다는 것.
"엄마를 자랑스러워해요. (이번 작품이) 아이들이 크고 나서 영화를 처음 찍은 것이니까. 영화는 처음이죠. 같이 무대 인사를 갔는데 자랑스러웠나 봐요. 엄마가 영화에 나오고 또 다른 배우들이랑 함께 배우처럼 무대 인사를 하니까 그런 게 색달랐나봐요. 말로 표현은 안 하는데 느껴졌어요. 둘째는 아직 그런 거는 모르고. 포클레인이 빠지는 장면이 제일 재미있었다고 했어요.(웃음) 그러면서 개봉 무대인사는 따라 다니겠대요"

아이들의 이야기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역시 엄마였다. 평소에도 놀러가는 것보다 아이들과 함께 집에 있는 게 좋다는 오연수에게 이제 아이들은 작품 선택에도 영향을 미칠 만큼 큰 영향력을 가진 존재들이다.
"엄마의 일이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저는 아이들에게 촬영 현장에도 오라고 해요. 엄마가 어떻게 일 하는지 궁금할 것 같아서요. '아이리스Ⅱ'도 첫째 때문에 하게 됐어요. 처음엔 할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첫째가 1편을 잘 봤어요. 엄마 이거 꼭 하라고, 친구들도 엄마가 꼭 하라고 그랬다고 말하더라고요. '주몽'을 찍을 때도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 아이들 사이에서 주몽 엄마라 불리고 인기가 많았어요"
남편 손지창 역시 15년 만에 아내가 찍은 영화에 대해 좋은 평가를 내렸다. 그는 평소 속내를 숨길 줄 모르고 거침없이 말하는 남편의 성격을 알기에 이번 영화에 대한 평가 역시 남편의 말만 믿기로 했다.
"남편은 시나리오도 안 봐서 내용도 몰랐어요. 우리 가족이 그래요. 저희 엄마는 '너는 남한사람이니 북한사람이니' 물어볼 정도였다니까요(웃음). 남편이 보고 나서 '생각했던 것 보다 잼있었어. 그런데 장르는 모르겠어' 라고 말해줬어요. 우리 남편을 돌직구라 속에서 한 번 걸러서 안 나와요. 나쁘면 그거 완전 이상해. 와이프건 아니건 나쁘면 나쁘다고 할 사람인데 의외로 재미있었다고 얘기해서 깜짝 놀랐어요"
현재 KBS 드라마 '아이리스Ⅱ'를 촬영중인 오연수는 앞으로도 영화를 찍을 의향이 있다고 했다. 수입으로 따지면 드라마가 더 많지만 브라운관이든 스크린이든 조급해 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작품들을 지금까지처럼 꾸준히 하겠다는 것. 그래서인지 배우로서 추구하는 삶의 목표 역시 소박하면서도 분명했다.
"확 히트됐으면 좋겠다, 인기가 올라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은 없어요. 무난하게 업다운 없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제가 원하는 바에요. 많은 사람들이 이건 진짜 삼류다 저질이다, 이런 작품이 어디 있어, 라고 말 할 정도만 아니면 돼요. 내가 좋아하는 일, 아이들이 우리 엄마가 이런 작품을 해서 자랑스럽겠다, 엄마의 직업을 존중해주고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배우, 그게 다에요. 가늘고 길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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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