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 "이상적인 슈왈제네거 영화란 평에 만족"[인터뷰]
OSEN 정유진 기자
발행 2013.02.22 11: 28

할리우드에 진출한 한국 감독들의 미국 영화 시스템 적응기는 눈물겹다. 모든 것이 미리 통제돼 있기에 감독의 장악력이 한국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는 할리우드의 낯선 시스템 속에서 감독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의 과제였다. 돌아온 액션스타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영화 '라스트 스탠드'를 찍었던 김지운 감독 역시 그랬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에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가미할 수 있는 영화를 택했지만 늘 설득과 타협이 필요했다.
"아트 영화이면 모르겠지만, 할리우드는 '라스트 스탠드' 정도의 버젯(Budget)에 준하는 상업 영화일 경우 사전에 통지되지 않고, 확정되지 않은 것을 현장에서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로렌조(프로듀서)가 현장에서 떠오르는 저의 아이디어를 옮기는 방법과 발견하는 스타일을 알고 뒤에서 받아줬던 부분들이 있어요. 그러기까지는 여러 고비와 에피소드들이 있었죠. 계단에서의 총격전 장면도 원래는 못 찍게 했어요. 그 전까지 확 터진 공간에서 액션이 있었으니 밀폐된 공간에서의 액션도 필요할 것 같았는데 제작진은 '회차가 늘어나서 못한다. 한 회차를 뽑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저는 '2 회차만 달라, 2 회차 쓸 때 낮 촬영이 끝나고 3시간 정도만 오버 차지를 해 달라. 이틀 동안 찍겠다'고 요구를 했고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더라고요. 그래도 고집을 피워 찍었어요. 찍은 것을 보더니 그 다음부터 고개 끄떡이면서 감독이 요구하는 걸 다 들어주더라고요. 좋아지는 것을 느끼니까요. 그 때부터는 내가 현장의 중심이 돼가는 과정이었어요. 저만의 개성, 스타일, 유머, 액션 코드 섞을 수 있게 됐어요"
이렇게 가미된 김지운 감독의 아이디어는 영화 곳곳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들로 탄생했다. 옥수수 밭 추격전이나 밀폐된 건물 복도에서의 총격전, 마을 노인들의 캐릭터 설정과 총을 사용하는 할머니의 설정 등이 현장에서 낸 아이디어로 완성된 것들이다.

"초·중반까지는 적응하느라 아이디어를 많이 못 넣었고, 중반 이후로 여유를 가지며 내 색깔을 넣을 수 있었어요. 실제 영화의 흐름도 반은 정석대로 가고 그 다음부터 '비틀기'들이 많아요. 할리우드에 적응해 가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줘요.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뒤틀리고 기묘한 유머, B급 감성의 폭력장면이 그런 것들인데 시스템에 적응을 하면서부터 진지하지 않은 유머나 비틀린 어떤 감성을 전달하는 일을 시작했어요"
사실 김지운 감독을 향한 할리우드의 러브콜은 영화 '장화, 홍련'(2003)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 아시아 호러가 유행이었던 상황에서 '장화, 홍련'의 영향으로 또 다시 호러 영화 제의가 빗발같이 쏟아졌었단다. 그럼에도 그는 당장 할리우드 행을 택하지 않았다.
"같은 것을 반복하는 게 지겨웠죠. 분위기가 다른 풍의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저는 현재 어떤 영화를 찍을 때 생기는 모순이나 고통을 벗어나고 싶어서 이후에는 조금 다른 영화를 찍어요. '장화, 홍련' 때는 호러가 들어오고, '달콤한 인생' 때는 또 한참 느와르 장르 제의가 들어오고 '놈놈 놈'을 찍고 나니 또 서부극 위주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는데 다른 걸 하고 싶어 거절했어요. '악마를 보았다'를 찍고 나서 경쾌한 영화를 하고 싶었는데 마침 '라스트 스탠드' 제안이 들어온 거죠. 할리우드에서 제안이 오는 영화들은 보통 패키지 상태로 들어와요. 스토리, 시나리오, 주연들 다 캐스팅 돼 있는 식인데 할리우드에서는 어떤 아티스트로 인정받기 전 대다수의 감독은 고용감독 같은 느낌으로 일을 해요. 저에게는 할리우드에서 처음 영화기도 하고 미국 감독처럼 그런 시스템에 편안한 상황이 아니니까 초기 개발 상태부터 조금씩 아이디어를 많이 낼 수 있는 작품을 찾았죠"
 
'라스트 스탠드'(감독 김지운)는 헬기보다 빠른 슈퍼카를 타고 돌진하는 마약왕과 아무도 막지 못한 그를 막아내야 하는 작은 국경마을 보안관 사이에 벌어지는 생애 최악의 전투를 그린 작품이다. 할리우드 액션 영웅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기를 마치고 10년 만에 복귀하는 작품으로도 유명세를 탔다. 그는 극 중 노쇠한 늙은 영웅처럼 묘사된다. 숨에 차 헉헉 대고, 자식 같은 후배 보안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과거 '터미네이터'로 대표되는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무쇠 같은 이미지와는 조금 온도차가 있는 캐릭터인 것이 사실.
"처음에는 주저했어요. 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액션 영화의 아이콘인데, 그 아이콘을 다루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작업이 아니에요. 건드렸을 때 엄청난 모험이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웠죠. 그러나 내가 생각했던 아이콘에 변형된 새로운 것을 가미하면 재미있을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왜 아놀드가 저렇게 해'라며 지금까지 못 본 걸 봐서 당혹스러워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죽은 제리를 끌어안고 글썽이는 장면, 액션 연기를 할 때 헉헉거리면서 힘들어하는 장면들이 그런 부분이에요. 오웬스(아놀드 슈왈제네거)를 통해 보여주려했던 것은 은퇴해 노쇠한 영웅에 대한 느낌이었어요. 잘 나가던 전직 LA 마약반 경찰이었지만 이제는 평화로운 여유를 즐기는 늙은 한 남자가 힘들고 고통스럽게 쟁취한 승리를 그려낼 때 효과가 클 거라는 계산이었죠"
김 감독의 말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캐릭터와는 조금 다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설정을 아놀드 슈왈제네거에게 제안했을 때 그가 이를 거절하면 어쩌나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슈왈제네거는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김지운 감독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캐릭터와 만날 수 있었다. 새로운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모습을 그린 영화에 대해 현지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김지운의 최고작은 아니지만, 할리우드의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결합해 지금 현재 나올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영화가 나왔다는 말에 만족해요. 최상의 평가죠. 굉장히 인상 깊었던 리뷰가 있었는데 '라스트 스탠드'가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출연한 '트루라이즈'(1994) 이후 나온 작품 중 최고라는 평이었어요. 저는 거기에 만족해요"
할리우드에서 처음 만든 영화인만큼 촬영 현장에서의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고, 시스템적인 부분이 익숙치 않아서  배우들이나 스태프들의 눈치를 볼 때도 있었다. 한국에서 ‘미국 현장은 이렇더라’라고 해서 신경 쓰고 갔던 것들이 실제로는 달라서 당황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할리우드에 대해 들었던 얘기가 할리우드는 올 콘티 작업을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정성껏 콘티를 그려놓고 붙여놓으면 ‘그림 잘 그리시네요’ 이러고 말더라고요. 그리고는 쇼트 리스트를 달라고 해요. 콘티가 아니라 쇼트 리스트로 했던 거죠. 쇼트 리스트는 워드 프로그램으로 쳐서 보여주면 되니까 쉬워요. 그렇지만 콘티를 밤 새워 한 컷씩 그렸는데 보고 있다가 쇼트 리스트 달라고 할 때 정말 당황스러웠죠”
김지운 감독은 할리우드와 한국의 영화제작 시스템의 가장 다른점으로 조감독 제도를 꼽았다.
"한국은 일단 가족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감독의 고민을 같이 스태프들이 같이 고민해 줄 수 있어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었고, 그래서 구조적으로 감독이 좀 덜 외로울 수 있는 게 장점이죠. 미국은 조감독 시스템이  한국과 많이 달랐어요. 한국의 경우 감독의 미학적 구조를 영화로 옮기는 데 서포트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는 반면 미국에서의 조감독은 서포트 하는 일이 한 이십프로 정도 되고 그 밖에는 자신이 애햐하는 일은 하는 고용 시스템이에요. 롤이 분명하게 분화돼 있어서 너의 일과 나의 일이 구분돼 있어요. 그런 시스템에 적응하는 게 능력이고 재능이니까 탓할 것만은 없는 것 같아요"
너무 힘들어서 ‘한국에서도 잘 나가는데 왜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지 물었더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내내 그랬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해보세요. 말도 안통하고, 한 번도 일해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랑 함께 일하는데 구조적으로도 감독의 장악력이 떨어지기도 하고, 저는 할리우드 데뷔 감독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어떤 감독이든 부족함이 있고, 그 부족함을 커버하면서 뭔가를 다르게 할 수 있는 융통성을 부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상황에선 단점이 극단적으로 드러나고, 커버하는 것도 떨어지고, 적응에 신경 써도 모자랄 판이었죠.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제네 도대체 뭐? 하는 기분으로 찍었어요”
그럼에도 할리우드 행을 선택한 이유는 뭐였을까. 결국에는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과 도전이었다.
“1순위는 배우들에 대한 궁금증이었어요. 인적자원이 풍부하니까. 2순위는 소재와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 볼 수 있다는 것. 3순위는 다양하고 광활한 로케이션의 매력이었어요. 어떤 장소든 그 공간의 이야기가 있는데, 미국을 가 보셨으면 알겠지만, 여덟, 아홉 군데의 전혀 다른 지역들이 예를 들어 하와이, 뉴욕, 아이오와가 한 나라라는 게 믿어지지 않아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이상한 나라가 미국이에요. 다른 공간과 다른 지형, 다른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 그게 미국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찍고 싶은 큰 이유 중 하나였어요”
 
김지운 감독과 비슷한 시기 박찬욱 감독 역시 미국에서 영화 ‘스토커’를 촬영 중이었다. 김 감독은 박찬욱 감독과 미국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을 회상하며 “그 시간이 참 좋았다”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촬영했고, 비슷한 시기 후반작업을 했어요. 박찬욱 감독이 좀 더 작은 사이즈 영화를 빨리 끝냈죠. 비슷한 시기에 미국에 있었는데 매주 금요일까지만 일하고 토요일 쉬니까, 토요일, 일요일에 같이 식사하고 영화보고, 콘서트나 전시회 커피 마시러 가고. 나는 그 시간이 좋았어요. 그 때 박찬욱 감독이랑 이야기 하면서 ‘(한국 영화가)우리가 없으니 왜 이렇게 잘돼?’ 이런 말을 하기도 했고(웃음)”
김지운과 박찬욱, 거기에 봉준호 감독까지 국민이 자랑하는 세 명의 감독이 부재한 사이 실제로 한국 영화는 많은 성장을 이뤘다. 지난해 천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두 편의 영화가 나왔는가 하면, 같은 해 10월에는 한국영화 한 해 관객 숫자가 1억 명을 돌파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올해 1,2월 사이에도 개봉한 많은 한국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해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에 대해 김지운 감독은 공감의 기쁨과 동시에 우려를 드러냈다.
“아쉬움은 있어요. 사이즈는 커지고 산업적으로는 팽창했지만 감독의 독창성이나 개성, 스타일과 미학적 요구가 반영되는 영화들은 점점 줄어드는 게 아닌가. 무엇이 문제일까. 이런 고민들을 한 적이 있어요”
"미국 현장에 있다보니 한국 현장이 그리워 한국말로 디렉션을 내리고 싶었다"고 말하는 김지운 감독은 현재 신민아-강동원 주연의 단편 영화 '하이드&시크(Hide&Seek)'를 촬영 중이다. 지난 19일에는 내한한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그의 촬영장을 방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이드&시크'에 이어 한 편의 단편을 더 찍고 미국에서의 두 번째 작품과 세 번째 작품을  논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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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선 기자 sunday@os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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