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생명력을 가진 모든 것은 반드시 죽게 돼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어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은 악착같이 살고자, 조금이라도 더 많이 살고자 안간힘을 쓴다. 반대로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자살률 1위다.
사람은 무엇에 살고, 무엇 때문에 살고자 하며, 왜 죽고자 하는가? 어쩌면 그 답은 SBS 수목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안에 들어있을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는 치열했던 안방극장 수목드라마의 시청률 경쟁에서 당당하게 1위를 내달리고 있다. 이제 1위 자리를 불변일 것으로 보일 정도로 강세다. 그 이유를 다수는 주인공 조인성과 송혜교의 폭발력, 노희경 작가의 필력, 김규태 PD의 영상미 등으로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과연 그럴까? '욕하면서 본다'는 드라마라지만 나름대로 그 속에도 자그마한 철학은 있기 마련이다.

이 드라마의 축은 살고 싶어하는 남자 오수(조인성)와 죽고 싶어하는 여자 오영(송혜교)의 갈등과 사랑이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버러지 같은 인생의 오수는 악착같이 살고 싶어하고, 재벌그룹 회장인 오영은 어떻게 하면 죽을 수 있을까 기회만 노린다. 반대가 돼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드라마는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쩌면 이게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청담동 갬블러' 오수는 아주 어려서 홀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뒤 고아원에서 자라온 밑바닥 인생이다. 그의 직업은 도박꾼. 사기와 도박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그는 별다른 희망이 엿보이지 않는 삶을 사는 가운데 연일 술과 여자에 빠져 지낸다.
그런 그가 78억원의 빚을 갚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처지에 놓인다. 짧은 시간 안에 그런 큰 돈을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그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생긴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동명의 오수가 바로 재벌 PL그룹의 외동아들이고, 그가 대신 죽은 오수 노릇을 하면 78억원보다 더 큰 돈을 손에 쥘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PL그룹 오수로 변장시키고 그 집안에 들어간다.
오영은 원래 오빠와 행복한 생활을 살아가던 남부럽지 않은 소녀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왕비서(배종옥)와 바람이 나 어머니와 이혼하면서 불행해졌다. 어머니는 오빠와 집을 나갔고 뇌종양에 걸린 그녀는 그대로 방치돼 시력을 상실했다. 마지막 희망이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아버지의 전재산을 물려받았다고는 하나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삶의 재미도 모른 채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녀의 주변에는 온통 재산을 노리는 하이에나들만 득시글거릴 뿐이다.
그런 살벌하고 무미건조한 그녀의 삶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오빠가 뛰어든다. 하지만 말라버린 그녀의 정서는 오수를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왜냐면 오수 역시도 자신의 재산을 노리고 뒤늦게 오빠 노릇을 하겠다고 허둥지둥댈 뿐, 진정한 사랑이 있는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사실이다. 진짜 오빠도 아닌 오수가 오빠 행세를 하는 것은 오로지 돈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수는 변해간다. 고독한 오영의 영혼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희망의 햇살을 비춰주기 위해 정성을 다한다. 게다가 어느덧 그는 오영을 여자로 보고 연정까지 품게 된다.
그런 오수의 진실을 어느덧 오영도 받아들이게 될 즈음 오영은 오수가 자신에게 주고자 했던 '편안하게 해주는 약'이 동물 안락사용 약품이란 것을 알게 되고는 분노하며 다시 마음을 닫는다.
오수가 살고자 하는 이유는 올라갈 여지가 많은 밑바닥 인생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그이지만 그래서 그에게는 희망이 있다. 오늘보다 더 잘 살 수 있다는.
오늘은 비록 비천한 갬블러일지 몰라도 그는 몫돈을 쥐게 되면 지금보다 훨씬 안락하게 살 수 있다는 미래를 꿈꿀 수 있다. 게다가 그는 인생을 즐긴다.
그는 19살 때 희주라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하고는 낳겠다고 고집부리자 '나같은 아이가 또 다시 생겨선 안된다'며 그녀를 거절하고 그런 그녀의 죽음을 목격한다.
그 뒤로 그는 섹스는 열매 속살이고, 사랑은 그 껍데기 정도로 여긴다. 그는 인기 여배우 진소라(서효림)에게 당당하게 이별을 고한다. 하지만 소라는 진심으로 그를 사랑한다. 오수를 차지할 수 있다면 그토록 사랑하는 배우 일을 던질 수도 있을 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수는 소라가 귀찮다. 아니 귀찮은 게 아니라 어쩌면 오수는 자신의 처절한 인생에서 사랑은 사치라고 여길 수도 있다.
그가 살고자 하는 것은 거친 밑바닥 인생을 충분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더이상 떨어질 수 없는 낭떠러지 밑에서 기어봤던 그로서는 더 나빠져도 예전의 생활보다 못할 것이 없는 처지이기에 조금만 노력하면 더 나은 생활이 보장돼 있다. 그래서 살고 싶은 것이다.
사랑을 몸에서 떼내야 할 종기 정도로 생각하는 그가 오영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이것은 그가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는 겉으로는 사랑을 거부하지만 사실은 그는 첫사랑 희주와의 순수했던 감정을 아직도 믿고, 그래서 그런 순백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큐피트일지도 모른다.
오영은 일반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재산을 가진 재벌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 앞에서는 벌벌 기고 어떻게든 그녀에게 잘 보이려 애를 쓴다. 하지만 그녀가 오수에게 말할 때마다 모두에 '우리 시각장애인들은'라고 전제를 다는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서 재미를 못 느끼고 미래에 흥미를 못 느낀다.
첫번째 그녀는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에 철저하게 가둬져있다. 그녀가 오수에게 옛추억을 강요하는 것은 그만큼 현재가 괴롭고 과거가 그립다는 의미다. 오빠 엄마와 함께 자주 갔던 강가를 그리워해 그곳에서 빠져 죽고 싶어하고, 갑부가 싸구려 솜사탕맛을 못잊어한다. 이것은 풍요로운 시각장애의 현재보다 아무 것도 모르지만 모든 것을 볼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이 행복했단 얘기다.
그녀는 쇼핑을 모른다. 물론 앞이 안 보이기에 예쁜 옷이나 액세서리로 치장할 이유가 없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돈 쓰는데 흥미가 없다는 의미다. 그녀는 오수가 진짜 오빠인지, 진짜 오빠일지라도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온 것인지도 모른 채 자신이 죽을 경우 전재산을 오수에게 주라고 유언장을 작성한다. 이것은 그녀의 희망과 목적이 돈이 아님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녀는 살 의지가 없는 것이다.
왜냐면 그녀의 곁에는 우방이 없다. 자신이 실질적인 오영의 엄마라고, 지금까지 오영의 엄마 역할을 하며, 오로지 오영의 건강만 걱정하며 돌봐왔다고 주장하는 왕비서는 사실은 오영의 불행의 씨앗이다. 그녀 때문에 오영의 가정이 파탄났으며 사실 오영의 눈이 먼 결정적인 원인제공자가 바로 그녀다.
왕비서는 사심 없이 오영을 돌봤고 앞으로도 그럴 참이라고 입으로 얘기하지만 머릿속에는 오영의 재산을 가로챌 궁리로 가득찬 사람이다.
더 나아가 죽은 아버지가 짝지워준 약혼자로서 오영의 첫키스 상대자인 이명호(김영훈) 본부장은 오로지 돈에 눈이 먼 철저한 이중인격자다. 그는 버젓이 연인이 있음에도 오로지 오영과 결혼해 그룹을 집어삼킬 야욕으로 오영을 사랑하는 척 하지만 사실 그는 시각장애인인 오영을 벌레 보듯 떨떠름하게 생각하는 치사한 인간이다.
그나마 아버지를 진심으로 모셨으며 순수한 마음으로 오영을 대하는 듯한 장 변호사(김규철)마저도 믿을 수 없다. 그는 왕비서를 짝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언제라도 오영을 배신할 수 있는 인물이다.
이런 맹수와 독충이 우글대는 정글같은 환경 속에서 오영은 이리 차이고 저리 치이며 힘들어서 살고 싶은 욕구를 못 느끼는 상태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후 간신히 새 회장으로 추대되긴 했지만 주주들은 눈 먼 그녀를 믿지 못하는 상황으로 언제라도 회장 자리에서 밀려날 위험성이 다분하다.
그녀는 왕비서가 없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게 수백 억, 수천 억원대의 재산은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자신에게 아부하려는 가식적인 악인들을 홀리는 페로몬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하루 빨리 생을 마감하고 이 치열한 정글에서 벗어나 진정한 안식을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사랑을 느낄 수 없다.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를 맡는 게 그녀가 사물을 판단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중요한 시각이 없는 상태에서의 촉각과 후각은 그녀의 심리상태를 움직이기에는 미약하다.
이 작품의 원작 '사랑 따윈 필요 없어, 여름'은 사실 오수와 오영 두 사람 모두의 감정 혹은 주장을 표현하는 말인데 사실 오수는 그 누구보다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기에 더 이상의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오영은 사랑을 느낄 조건을 못 갖췄기에 사랑 따윈 필요 없다고 울부짖는 것이다.
결국 이 드라마가 웅변하고자 하는 것은 삶을 유지하고 살고자 하는 희망을 자극하는 것은 결코 돈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교훈인데 실제 삶에서도 돈은 사람을 살고자 발버둥치게 만드는 희망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사람을 죽이는 절망의 독극물이다. 오수와 오영이 공동소유하자고 했던 동물안락사용 알약같은.
그래서 사랑은 삶의 희망이고 사랑을 못 얻거나 가질 수 없다면 절망이다. 죽고자 하는 오영처럼.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