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그야말로 힐링 열풍이다. 번화가에는 으레 '타이 마사지' 등 힐링 업소가 성황중이다 못해 이제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까지 힐링이 대세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은 전국 관객 1232만 명을 동원하며 역대 한국영화 흥행순위 3위에 올랐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다. 이 영화에는 장동건 이병헌같은 톱스타도 없고 잘 빠진 미녀배우가 등장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주조연에 불과했던 류승룡을 앞에 내세웠고 여주인공은 이제 7살의 갓 데뷔한 아역 갈소원이다.
봉준호나 강제규같은 스타감독이 메가폰을 쥔 것도 아니다. '각설탕'의 이환경 감독이다. 나름대로 휴먼드라마에서 실력발휘를 하고 있는 감독이긴 하지만 대성공을 맛본 감독도, 배우들이 앞다퉈 출연을 자청할 정도의 거장 감독도 아니다.

이 영화가 처음에 마케팅 포인트로 삼은 것은 코미디였다. 바보 연기를 하는 류승룡을 첨병으로 내세우고 오달수 박원상 김정태 정만식 등의 감초조연들을 뒤에 포진시켜 알싸한 코미디를 선사할 것으로 포장했다.
사실 그 마케팅 방향과 영화의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니다. 이 영화 광고에서 강조하는 류승룡의 "이용구 1961년 1월 18일 태어났어요 제왕절개. 엄마아팠어요. 내 머리커서"라는 대사처럼 영화 곳곳에는 포복절도할 웃음의 코드가 숨어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문을 나서는 관객들은 정작 눈가가 상기돼 있다. 사정 없이 눈물을 흘리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가운데 마음의 상처를 일시적으로나마 치유하는 게 이 영화의 미덕이고 강점이다.
지난 14일 개봉된 영화 '파파로티'도 만만치 않다. 15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상망 집계에 따르면 '파파로티'는 개봉 첫 주말 45만여명 관객을 동원, 박스오피스 2위를 기록하며 흥행 가능성을 내비쳤다. 같은 날 개봉한 1위 '웜 바디스'(조나단 레빈 감독)의 뒤를 바짝 추격중이며 '신세계'(박훈정 감독)와 '7번방의 선물'을 3, 4위로 끌어내렸다.
이 영화는 한때 잘 나갔지만 지금은 시골 구석 예술고등학교의 음악선생으로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상진(한석규)과 어느날 그 학교에 전학온 성악천재이지만 조폭 중간보스로 일하고 있는 장호(이제훈)의 감동적인 휴먼스토리를 담고 있다.
상진은 처음에는 장호를 깡패라고 무시하지만 그의 뛰어난 실력과 더불어 음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접하고는 달라진다. 진심으로 그를 가르치며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대신할 희망을 품는다.
그래서 그는 장호가 몸담은 조직의 보스에게 무릎을 꿇고 장호를 놔달라고 부탁한다. 자신은 피아노를 쳐야 하므로 손목은 내놓을 수 없으니 발목을 내놓겠다고.
천부적인 싸움꾼인 장호는 성악을 가르쳐줄테니 절대 주먹을 휘두르지 말라는 상진의 당부를 지키느라 상대 조직의 테러에도 저항하지 않고 오롯이 매를 맞아낸다. 드디어 장호가 진정한 성악가로 거듭나는 과정이고 그와 상진 사이의 교감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에는 남녀간의 멜로도 없고 가족 간의 진한 갈등과 화해같은 장치도 없다. 다만 선생과 제자가 아닌, 같은 음악인으로서 만난 두 남자의 진한 우정이 관객들의 콧등을 시큰거리게 만든다. 그렇다. '7번방의 선물'과 비슷한 맥락의 힐링이다.
방송가에서는 원조 힐링 프로그램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를 비롯해 KBS2 '인간의 조건' MBC '일밤-아빠! 어디가?' SBS '땡큐' 등이 힐링을 컨셉트로 예능 프로그램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하고 있다.
'힐링캠프'는 일반 예능 프로그램에서 섭외하기 쉽지 않은 스타를 초대해 그들의 진솔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연들을 이끌어냄으로써 그들을 치유해준다. 그런데 정작 힐링을 경험하는 것은 시청자다. '저렇게 유명한 스타도 그런 사연이 있었는데'라는 놀라움과 동질의식이 어느덧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것이다. 게스트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MBC '무릎팍도사'의 업그레이드 버전인데 훨씬 더 깔끔하고 인간적이며 안정적이다.
'인간의 조건'은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됐다가 정규편성됐다. 그만큼 힐링의 힘이 크다는 얘기다. 이 프로그램에는 박성호 김준호 김준현 허경환 양상국 정태호 등 '개그콘서트'의 대표 개그맨들이 출연해 합숙을 하며 미션을 수행한다. 그들은 쓰레기 없이 사는 법, 자동차 없이 사는 법 등의 친환경적인 미션을 몸소 수행하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 한편 이것을 대중에게 널리 계도하는 역할을 해낸다. 한마디로 환경을 치유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치유해준다.
'아빠! 어디가?'는 일부 아역스타를 성인역할에 대입시켜 자극적으로 소비하는 다수의 예능프로그램과 차원이 다른 고품격 리얼 힐링 프로그램이다. 아버지와 아들 혹은 딸을 여행을 보내 자연을 만끽하는가 하면 불편한 숙소와 환경에서 체험을 하게 만들면서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좀더 가깝게 밀착시켜주는 가운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함과 더불어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우리는 가족의 소중함을 그 누구보다 절실하게 깨닫고 있지만 실생활에서 가족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고 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그 누구보다 가까워야 할 부모-자식은 각박한 생활과 개인주의 풍조의 만연으로 점점 멀어지고 있는 상황. 그 속에서 '아빠! 어디가?'는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보듬고 아끼고 보호해주며 서로의 힐링을 도와주는 형식으로 시청자들에게 훈훈한 웃음을 심어준다.
'땡큐'는 배우 차인표, 전 야구선수 박찬호, 만화가 이현세, 사진작가 김중만 등 중년 이상의 네 남자가 여행을 하며 그곳에서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점잖고 착한 프로그램으로 연예인들로 채우는 일반 예능과 차별화된다. 옛추억을 얘기하기도 하고 현재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면서 짧게는 40년에서 많게는 60년을 살아온 이 지긋한 전문직 남성들의 덤덤하고 진한 인생살이가 시청자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전 사회적으로 왜 이렇게 힐링이 유행인가? 그 답은 도대체 현대인들은 얼마나 크고 깊게 상처를 입으며 살아가는가에서 찾을 수 있다.
믿고 사먹을 음식이 없다고 한숨을 토해낼 정도로 쏟아져나오는 시중 판매 음식에 대한 부정적인 뉴스와 각종 오염과 환경파괴로 인한 질병과 환자의 보도는 삶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사회지도층과 고위 정치인은 툭하면 검찰에 잡혀가고 그 검찰이나 심지어 판사마저도 믿을 수 없다. 가족간에 죽고 죽이는 사건이 생기는가 하면 어린 자식들과 투신자살한 엄마의 소식도 들린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경제는 수년째 하락하며 회복될 줄 모른 채 서민들의 불안감만 가중시키고 있다. 부동산 발 경제침체 현상은 이대로 가다가는 중산층 이하 서민들을 모조리 길거리로 내쫓을지 모른다.
돈이 없으니 서민들은 마땅히 스트레스를 풀 곳도 찾지 못하고 여가를 즐길 수단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적게 돈이 드는 극장을 찾거나 그것마저도 돈이 아깝거나 귀찮다면 그저 퇴근 후 집안에 쳐박혀 TV를 시청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속에 바로 일시적 처방전이 있었다. 바로 힐링의 영화, 힐링의 예능 프로그램이다.
대중은 고난스럽고 지난한 삶의 무게를 '7번방의 선물'이나 '힐링캠프'를 보는 순간만큼은 느끼지 않는다. '아빠! 어디가?'를 보면서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되살려내고 그간의 섭섭함을 씻어내면서 뒤늦게나마 효도는 아니더라도 최소한의 도리는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리고 마음만 앞설 뿐 척박하기만 한 현실 앞에서 어디론가 훌쩍 떠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늙수그레한 남성들이 잔잔하게 수다를 떨며 여행하는 '땡큐'를 보며 대리만족한다. '언젠가 시간내서 저기 한 번 꼭 가봐야겠노라'고 다짐하면서.
헬스클럽이나 사우나가 성행하는 것은 경제상황이 그리 나쁘지 않다는 증거지만 마사지 집이 많이 생기는 것은 그만큼 고단하고 지친 사람이 많다는 증거다. '인간의 조건'이 재미있는 것은 현실적으로 절대 쓰레기를 만들지 않을 수 없는데 출연자들이 악착같이 불가능을 가능케 만드는 것을 보고 판타지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게 아프고 괴로운 현대인들에게는 힐링이 절실하다.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