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모의 테마토크] 살고자 했지만 죽을 수 밖에 없거나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목도해야 하고, 사랑했지만 사랑 때문에 인생이 망가지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다. 이렇게 불쌍한 남자들이 또 있을까?
SBS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오수(조인성)와 '야왕'의 하류(권상우)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천애고아다. 오수는 갓난아기 시절 엄마가 나무 아래 버렸다고 해서 나무 수 자를 이름으로 했다. 하류는 엄마가 쌍둥이를 낳자마자 세상을 떠난 후 경제적으로 보나 형편상으로 보나 아버지 차심봉(고인범)이 혼자서 둘을 키우기 버거워 자신만 고아원에 맡겨졌다.

오수는 어릴 적 박진성(김범)의 집에 입양돼 박진성과 둘도 없는 사이로 자라나 함께 팀을 이루고 도박장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양아치다. 그는 19살 때 희주와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걸 경험한다. 그런데 희주는 오수의 아이를 낳고 싶었지만 오수는 그게 싫어 희주를 떠났다. 자신처럼 쓰레기같은 삶을 살아가는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희주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 그에 대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느라 오수는 '내 인생에서 사랑 따윈 필요 없어'라고 되뇌이며 아무 여자하고나 원나잇스탠딩을 하는 게 일상이다.
그러다가 아집에 집착하고 착각에 목 매는 진소라(서효림)라는 여자에게 된통 잘못 걸린다. 오수는 가벼운 엔조이였지만 진소라는 진심이었다. 그래서 진소라는 떠나가는 오수를 되돌리기 위해 덫을 놓는다. 그녀는 자신의 스폰서인 김사장의 돈 70억 원을 빼돌린 뒤 김사장에게 그 돈을 가져간 이가 오수라고 거짓말한다.
김사장은 희주를 짝사랑했기에 오수와 악연이 있는 깡패 조무철(김태우)을 내세워 오수를 압박한다. 조무철은 이자와 자신의 수고비까지 총 78억 원을 100일 내에 갚든가,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손에 죽게 된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오수는 자신과 동명이인인 PL그룹 외동아들 오수 흉내를 내게 된다. 그 오수는 PL그룹 오 회장의 아들로 어릴 적 부모가 이혼하며 엄마와 함께 집을 나갔고 그후 사기꾼 오수와 함께 살다가 얼마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PL그룹 오수의 유일한 혈육 오영(송혜교)은 죽은 아버지의 전 재산을 물려받아 살고 있지만 어릴 적에 시력을 잃은 뒤 희망마저 잃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오수는 오영에게 접근해 그녀의 추억을 자극한 덕으로 그녀의 마음을 여는데 성공하지만 충분히 78억 원을 챙겨서 튈 수도 있는 상황에서 그러지 못한다. 오영의 삶이 매우 애처럽고 그녀의 환경이 아주 척박해서다. 그녀의 주변에는 친절과 애정을 가장하지만 정작 재산에만 눈이 먼 탐욕의 인물들만 넘쳐나고 앞을 못 봐서 무능하기 그지 없는 오영의 하루하루는 각박하기 그지 없고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오영을 어느덧 오수는 사랑하게 된 것이다. 사랑에 상처받고 사랑에 진저리쳐 사랑 따윈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쓰레기라고 생각했던 오수는 이제 삶의 목표가 사랑이고 인생의 가치관이 사랑이다.
결국 오영은 오수가 친오빠가 아닌 사기꾼임을 알게 됐다. 이제 두 사람의 관계는 근친상간이 아닌, 정상적인 남녀간의 사이로 발전될 수 있지만 오수는 자신의 애초의 목적이 들통났기 때문에 열정이 식고 분노가 대신 타오르는 오영의 마음에 접근할 수 없다.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 시각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생애 두번째로 느껴본 진실하고 절절한 사랑은 높고 두터운 벽에 꽉 막혀버렸다. 이제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도 살아갈 희망도 없다.
오수가 사랑으로 인해 변했다면 하류에게 사랑은 불필요한 사치고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그는 모든 것을 던져 주다해(수애)를 사랑했다. 더럽고 치사했지만 주다해의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억지로 호스트바에 나갔다. 그녀의 미국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늙은 여자에게 몸까지 팔아야 했다.
하지만 그 돈으로 주다해는 백학그룹 외동아들 백도훈(정윤호)을 유혹했다. 그리고는 자신과 딸 은별을 보기 좋게 버리고 백도훈과 결혼해 백학그룹에 입성했다.
하류는 의붓아버지를 죽이고 산에 암매장한 주다해의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실형까지 살았다. 그리고 감옥에서 은별의 사망소식을 접해야 했고 출소 뒤 쌍둥이 형 차재웅 변호사의 죽음까지 맞닥뜨려야 했다.
삶의 의미와 희망의 끈을 완전히 놓아버린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주다해에 대한 복수 뿐이었다. 한때 목숨보다 사랑했던 여인에게 처절하게 배신당한 뒤 그녀의 목에 칼을 겨눠야 하는 그의 운명은 가혹하다. 게다가 그 복수마저도 쉽지 않은 데다 주다해는 승승장구해 영부인 자리에까지 오른다.
분명히 그의 삶에 복수란 목표는 있다. 하지만 그의 삶에 희망이나 즐거움 따위란 게 있기나 한 걸까? 애지중지하던 딸을 잃고 전혀 모르던 존재였던 쌍둥이 형을 만나자마자 잃은 그의 복수를 향한 발걸음이 상큼하거나 발전적일 수 있을까? 그는 복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복수 때문에 죽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인생은 한 번 밖에 없고 그나마 100년도 채 안 되는데다가 젊음은 더 짧다. 인생의 황금기라봐야 고작해야 30~40년인데 이제 30대 초반의 오수와 하류는 절망이 현실이고 죽음이 친구다.
그들이 처한 환경과 실상은 아파도 지나치게 아프다. 사람이 사는 이유는 태어났기에 사는 게 아니라 '오늘보다 나은 내일, 내일보다 더 나은 모레'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수와 하류에게서는 그런 희망의 여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만약 오수가 오영에게서 78억 원을 받아낸다고 치자. 그의 삶이 달라질 것은 없다. 또 다시 박진성과 도박장을 기웃거릴 것이고 돈이 생기면 술과 여자에 빠져 방탕하게 살 뿐일 것이다. 젊은 날 한때 그런 삶이 재미있을 수도 있겠지만 의미는 없다. 가장 중요한 점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이다. 도박을 할 때마다 이길 수는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얼마나 살지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게 중요하다.
오수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영이 눈을 뜨고 오수의 진심을 알게 돼 다시 그를 남자로 봐준다면 '두 사람이 잘 먹고 잘 살았다더라'라는 해피엔딩의 동화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절대 그렇지 못하다. 아직 결론은 안 났지만 뇌종양 관련 최고 권위자 조순 박사는 오영의 수술 성공확률이 10%도 안 된다며 수술을 만류하고 있고 오영의 뇌종양은 점점 악화돼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은 것으로 그려진다.
이제 오수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오영이 사는 것이고 눈을 뜨는 것이다. 만약 그녀와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금상첨화일 것이다. 하지만 오영이 자신을 기만한 오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까지 20년간 세상에 눈을 닫고 살아온 그녀가 마음의 눈을 뜨고 사랑이라는 환각물질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것도 사기꾼을 상대로?
번번이 주다해에게 당하기만 해온 하류는 마지막 히든카드로 주다해를 영부인 자리에서 끌어낼 좋은 기회를 잡았다. 석태일이 주다해를 버릴 마음이고 그래서 하류와 이해타산 관계가 맞아떨어져 하류가 특검 팀에 합류해 주다해를 옭죄고 있다.
하지만 하류가 주다해에게 통쾌하게 복수를 한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무엇이 희망적으로 달라질 수 있을까? 결국 그의 가슴은 더욱 공허해질 것이고 그나마 지금까지 복수라는 목표가 있어서 숨을 쉬었지만 향후 그가 살아가야 할 존재의 이유는 미미해질 것이다. 왜? 사랑하는 사람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났으니까.
그는 숨쉬는 동안은 은별과 차재웅에 대한 죄스러움과 안타까움에 괴로울 것이다. 그리고 비록 주다해에게 복수했지만 주다해와의 행복했던 시절만큼은 못잊을 것이다. 그 추억이 그의 삶을 부패하게끔 갉아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차재웅 행세를 하며 특검 팀에서 활약까지 했다. 그는 사기죄와 변호사법 위반죄로 감옥에 가야 한다. 영부인의 비리까지 파헤칠 수 있는 세상에서 하류같은 잡범 따위 잡아들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결국 목적과 희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보람이 없는 삶은 결코 행복하지 못하다. 이 척박하고 애처롭기만 한 삶을 사는 오수와 하류, 불쌍해서 어쩌요?
[언론인, 칼럼니스트] ybacchu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