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하는 철학자. 최근 배우 한석규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토크쇼에 출연해 느릿느릿한 말투로 자신의 생각을 전하며 한 번, 두 번 더 곰곰이 속으로 씹어볼 수밖에 없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철학자라 표현할 만 했다.
철학자라는 별명답게 그는 “내가 왜 연기를 하지?”라고 늘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했다. 그 답이 없다면 너무 힘들었을 거라고, 힘든 순간을 다시 딛고 일어나는 원동력이 거기에 있다고, 자기만의 답을 찾아 꾸준히 인내심을 갖고 연기를 하라고. 그는 후배들에게 그런 용기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에 참여한 모두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연기하는 철학자는 멋쩍은 듯 온화한 미소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왜 이런 식으로 재미없게 얘기하지? 저도 모르겠어요. 막 생각해보게 되네요. 뭐지? 뭘까?”

‘베를린’으로 액션을 선보인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영화 ‘파파로티’로 돌아온 그는 극 중 까칠한 음악 선생 상진 역을 맡았다. 과거 실제로도 성악가의 꿈을 꾼 적이 있어 배역과 남다른 인연이 있었다. 음악이라는 소재도 소재지만 그가 이 영화를 택하게 된 계기는 자주 보는 EBS 채널에서 접하게 된 청소년 대담 프로그램이었다.
“어느 날 청소년들이 대담을 하는 프로를 봤어요. 자기들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는데 학교폭력부터 스트레스, 미래에 대한 불안함, 우리가 한국 사회에서 왜 이런가. 왜 학생들이 어려운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듣고 있는데 저도 참 답답하고 기성세대로서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제가 생각했던 10대 때보다 지금 친구들이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하고 힘든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기성세대들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고 있고요. 참 저 위에 있는 부모세대도 참 안됐다, 청소년들을 너무 모르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하는 일중에 하나가 영화고 연기니까 그것을 통해 그 친구들에게 위로를 주는 것을 꼭 해보고 싶었어요. 무슨 얘기 하고 싶었냐. ‘하고 싶은 것을 해라. 하고 싶은 걸 하는 것도 힘들지만, 가꾸는 것도 힘들다. 그래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파파로티’가 그런 이야기에요”

‘파파로티’에서 한석규는 영화의 개봉 전 입대한 배우 이제훈과 호흡을 맞췄다.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을 물었더니 가장 큰 장점을 진솔함으로 꼽았다. 그리고 그 진솔함이 가장 잘 드러날 수 있게 한 것이 이제훈의 연기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완성된 영화를 몇 번이나 봐서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딱 하나 장점은 영화가 진솔하게 나왔어요. 제훈이를 칭찬해주고 싶어요. 제훈이는 진솔함이 가장 큰 장점이에요. 연기의 테크닉 같은 나머지 것들은 한 작품씩 하고 경력이 쌓이면서 좋아질 거라 봅니다. 그런데 해도 늘지 않는 것은 맨 처음 연기에 대해 갖고 있었던 마음이에요. 그런 것은 많이 한다고 늘지 않거든요. ‘건축학개론’을 보면서 저 친구의 장점과 매력이 저거구나, 생각했어요. ‘파파로티’의 장호는 그게 아주 딱 맞아 떨어진 배역이었고. 참 좋아요”
그리고 이어 자신과는 세대도 연기관도 달랐던 까마득한 후배 배우 이제훈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초록물고기’를 제훈이가 5학년 때 봤다네요. 제가 많이 어려웠겠죠. 제가 5학년 때면 신성일 선배님이 ‘겨울여자’를 하실 땐데, 선배님과 같이 연기를 해 본 적은 없거든요. 제훈이가 얼마나 어려웠을까. 세대가 다른 두 배우가 충돌하는 것, 연기관도 틀리고 스타일도 다른 두 세대가 팍팍 충돌하는 것, 연기를 하며 그런 게 참 재미있었어요”
외부적으로 볼 때는 큰 부침 없이 영화배우로서의 인생을 걸어온 한석규였지만, 그에게도 연기에 대한 두려움이 몰아닥쳐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던 때가 있었다. 막 40대에 들어서 배우로서 한창의 시간을 맞이할 때였다. 대학교 때 배우의 꿈을 한 차례 좌절시킨 바 있었던 허리의 고질병이 또 다시 찾아온 것.
“21살 때 군에서 허리를 수술하고 나와서 배우의 꿈을 접었어요. 졸업하고 성우가 된 거죠. 배우는 몸으로 해야 하는데 몸을 다쳤었요. 수술하면 나을 줄 알았는데 금방 안 나았어요. 3년이나 걸렸어요. 이후에 배우를 어떻게 하게 돼서 했는데 2001년 ‘이중간첩’ 할 때 쯤 같은 부위를 또 다쳤어요. 40세 때라 회복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 5년은 넘을 것 같다, 생각하면서 연기에 대한 두려움 생겼어요. 리듬도 잃고, 힘들었죠. 그렇지만 그런 일을 겪고 극복을 할 수 있었던 게 좋았던 것 같아요. 몸에 이상이 없어 계속 박차고 올라갔다? 그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그 어떤 세계, 어떤 배우도 계속 박차고 올라가는 경우는 없어요.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거죠. 그리고 끝까지 가는 건 인내심이고 기다림이에요. 언젠가 자기의 그런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 저도 그래요”
고질병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꾸준한 관리였다. 체중을 유지하고 무리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서서히 리듬을 되찾아 갔다. 그리고 나서 찍은 다음 작품이 영화 ‘주홍글씨’였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무대가 됐기에 더욱 남다른 작품이었다. 두려움에 맞섰던 시간들이 그를 본질에 더 가깝게 이끈 것일까. 한석규는 왜 연기를 하는지 스스로에게 매일 집요하게 물어왔다고 했다. 그리고 찾은 답은 “관객이 아닌 내가 느끼기 위해서”였다.
“전에는 관객을 위해서 연기를 하는 쪽에 정신이 많이 팔렸었어요. 그러다 내가 연기를 하는 게 관객을 위해 하는 건가? 자문했더니 그건 아니었어요. 그 때 들었던 생각이 이거에요. 관객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 연기를 했다면 그게 아니다, 내가 느끼고 싶어 연기를 했다. 어떤 영화들 속에서 어떤 배우가 꿈꾸게 만들었던 그 느낌을 또 느끼고 싶어 연기를 한 것이다. 이게 굉장한 차이를 만들어요”

한석규는 신인 감독들과의 작업을 선호하는 배우로도 유명하다. 최근의 필모그래피만 봐도 ‘이층의 악당’(손재곤 감독), '백야행-하얀 어둠 속을 걷다'(박신우 감독),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변승욱 감독), ‘구타유발자들’(원신연 감독) 등 비교적 젊은 감독들이 연출한 작품이 많다.
“저는 처음부터 신인들과 많이 했어요. 대학교 때 서울 영화집단이란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때 거기서 나온 책 중 ‘새로운 한국 영화를 위하여’라는 것이 있었어요. 그 책을 군대에서 읽었는데 너무 좋게 봤어요. 주제는 말 그대로 새로운 한국 영화였는데 미국에서도 프랑스에서도 기존의 것을 뒤엎고 새로운 물결이 일어나며 영화가 발전했다는 대목을 보면서 한국 영화에 그런 게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그런 생각을) 잊고 있다가 ‘초록물고기’가 끝나고, 그런 생각이 확 들더라고요. 새로운 한국 영화에 도움이 되는 그런 게 하고 싶다. 그런 게 필요할 때다. 신인감독과의 작업은 정말 필요하고 좋은 거예요”
“남자배우는 40대부터다”라고 말하는 한석규는 영화배우로서 하고 싶은 것이 아직도 많다. 가능하다면 나홍진 감독과 작업을 해보고 싶고, 오랜 동료이자 선후배사이인 최민식과도 좋은 무대에서 호흡을 맞춰 보고 싶다.
“많이 하고 싶죠. 많이 하고 싶어요. 이 나이 가기 전에. 남자배우는 40대부터예요. 그 때부터 시작이죠. 40대쯤 돼야 눈이 뜨여요. 많이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저는) 많이 했나? 많이 했네요. 40대가 ‘주홍글씨’때부터니까 그 영화가 11번째였고 지금 영화가 20번째니까 10개 했네요. 10년에 열 개, 18년 동안 스무 개 했어요. 적은 건 아닌 것 같네요. 앞으로 제가 몇 개나 할 수 있을까요? 스무 개나 할 수 있을까요? 못 할 수도 있겠죠. 잘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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