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경기는 잘 알다시피 경험이 중시되는 스포츠다. 선수들의 기량적인 측면에서도 물론 그렇지만, 과거 오랜 세월 쌓여온 전통과 전례를 기반으로 오늘의 규정이나 규칙이 만들어지고 변화해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론적으로도 경험은 야구경기를 풀어가는데 있어 대단한 재산이자 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야구가 어떤 종목이던가? 수많은 규정과 규칙 그리고 각각의 조문들에 따르는 세부조항과 예외 조항들. 여기에 시대의 생각과 흐름에 발맞춰 변화되고 수정되어지는 기타 규정들까지.
2000 경기이상 출장경험을 갖고 있는 어느 공식기록원은 회고하듯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처음 데뷔할 때의 생각으론 한 10년쯤 하면 모르는 것 없이 일이 쉽게 풀릴 것 같았는데 지나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10년이 지나고 그 위에 10년이 더 쌓여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경험으로도 쉽게 풀리지 않는 숙제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라고.
이 말은 엄살이 아니다. 베테랑급 심판원이나 기록원들도 같은 뉘앙스의 얘기를 자주 하곤 한다. 야구는 그만큼 복잡하고 다단한 운동종목이다. 문서상 온갖 경우의 수를 열거해 놓고 있지만, 애매해 막상 찾아보면 딱 들어맞는 조항이 없을 때도 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심판원이나 기록원의 재량권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부분에서 각종 상황들을 대비해 규칙이나 규정을 마련해 놓고는 있지만, 워낙 복잡한 구석이 많다 보니 헷갈릴 때도 있고 깜박하고 잊고 넘어가는 일도 더러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그 잠재적 위험성이 가장 크게 도사리고 있는 부분을 하나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투수교체 규정이다.
지난 6월에는 투수교체 규정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실랑이들이 연달아 벌어졌다. 이미 지난 일이지만, 해프닝 차원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것보다는 간접경험 차원에서 벌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없었는지, 돌아볼 것은 없었는지를 재차 확인해 보는 것도 앞을 위해 나쁘지 않을 터. 야구규칙 안에 존재하고 있는 투수교체 규정의 위험성을 하나하나 파헤쳐보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먼저 23일 문학구장 SK-롯데전에서는 6회말 SK의 공격이 시작된 직후, 선두타자 김상현(SK)을 상대로 투구 중이던 롯데 김수완이 볼카운트 2볼 상황에서 마운드를 내려간 것이 문제가 되었다. 롯데 투수코치 정민태는 마운드에 올라와 김수완을 정대현으로 교체하겠다는 교대통보를 전했는데, 이를 막지 못한 때문이었다.
올 시즌을 앞둔 3월, KBO 규칙위원회는 선발투수와 구원투수의 의무조항 하나를 추가 신설한 바 있는데, 이 부분이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미 경기에 출장하고 있는 투수가 새로운 이닝의 투구를 위해 파울라인을 넘어서면 그 투수는 첫 번째 타자의 타격이 종료될 때까지 투구해야 한다’ (상대 첫 타자가 대타로 바뀌거나, 투수가 부상 등에 의해 투구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심판원이 인정한 경우는 예외)
이 조항이 신설된 이유는 투수교체 소요시간의 축소와 의도적인 투수교체 지연작전을 막기 위한 것으로 현행 메이저리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 규정이다.
따라서 김수완은 첫 타자였던 김상현을 주자로 내보내거나 아웃시킬 때까지 마운드를 내려갈 수 없는 신분이었던 것이다. 물론 뭔가 잘못된 것을 직감한 SK 이만수 감독이 마운드에 때맞춰 올라와 어필하기 했지만, 미리 김수완의 강판을 막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심판원의 결정으로 묵살되었고, 올라올 수 없는 정대현이 마운드에서 임무를 이어받는 것으로 상황은 정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도 규칙적으로는 부합하지 않는다. 야구규칙 3.05 (c)항의 에는 다음의 내용이 들어있다.
‘감독이 3.05 (c)를 위반(교체가 허용되지 않는 투수의 교체를 말함)하여 투수를 물러나게 하려고 할 때에는, 심판원은 그 감독에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야 한다. 우연히 주심이 실수하여 규칙에 허용되지 않은 투수의 출전을 발표하였을 경우에도 그 투수가 투구하기 전이라면 정당한 상태로 바로잡아야 한다’ (만일 잘못 출전한 투수가 이미 1구를 던졌다면 그 투수는 정규의 투수가 되며, 이후 벌어진 모든 플레이는 유효)
그러면 3.05 (c)항에 설명된 내용은 무엇일까?
‘규칙에 의해 교체가 허용되지 않는 투수가 출전하였을 때, 심판원은 이 규칙에 합당한 준비가 이루어질 때까지 정규투수에게 다시 등판하도록 명하여야 한다’
이 조항 역시 이미 마운드를 내려간 롯데 김수완의 재등판을 명시하고 있다. 참고로 이러한 경우, 공식기록원의 역할을 주문하고 있는 규칙 원문도 존재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생략) …주심이 볼카운트를 착각해 볼넷인 줄 알고 타자를 1루에 내보낸다든지, 교체할 수 없는 투수 대신 다른 선수가 출전하려 할 경우, 기록원은 심판원에게 바로 잡을 것을 조언하여야 한다’
경기의 진행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주심에게 권한이 주어져 있지만, 규칙적으로 위배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공식기록원 역시 공정한 경기진행을 위해 심판원 못지 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참고로 한국프로야구에는 투수교체 오류의 덫이 하나 더 만들어져 있는데, 바로 감독이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가는 횟수를 계산해 반영하는 투수교체 규정방식이 그것이다. 이를 정확히 말하면 앞서 설명한 3.05 (d) 항과의 충돌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다.
현재 우리는 한 경기(연장전 포함)에 감독 또는 코치가 작전지시를 위해 마운드에 오르는 횟수를 총 2회로 제한하고 있는데, 3번째부터는 무조건 투수를 교체하도록 하고 있다. (메이저리그에는 공식화된 규정이 없는 항목으로 한국프로야구만의 경기 스피드 업 유도차원 규정이다)
그런데 이미 이 횟수를 모두 소진한 팀이 경기 후반 이닝에 아직 투수가 첫 타자와의 상대를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 마운드에 올라가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때 처리가 난처해진다는 점이다.
물론 감독이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가는 것(파울라인을 넘는 것으로 판단)을 사전에 제지하면 문제가 없겠지만, 경기 종반 상황이 급박하거나, 중간에 돌발상황이 끼게 되면 ‘아차’하는 순간에 막을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규정상 해당 투수는 3.05 (d) 항이 우선 적용되어 첫 타자와의 상대를 완료한 이후, 감독이나 코치의 마운드행 횟수 2회 초과에 따른 투수교체 규정을 이어 적용 받아 마운드에서 물러나야 하겠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고 이러한 사태를 막지 못한 부분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추궁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부쩍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 외의 투수교체 규정에 관한 또 다른 해프닝과 관련 규칙은 다음에 이어 살펴보기로 한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롯데 김수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