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특급’ 박찬호가 한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미국 메이저리그 동양인 최다승(124승) 기록의 주인공에서 대한민국의 평범한 한 가장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갖고 온 것은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기록만이 아니었다. 인생의 한 사이클을 끝낸 자만이 깨달을 수 있는, 완결에 가까운 인생 철학을 들고 왔다.
박찬호 에세이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는 그래서 더 놀라웠다. 대한민국 최초의 메이저리거가 기술하는 단순한 경험담일 줄 알았는데 완성도 높은 철학이 담겨 있었다. ‘코리안 특급’으로 인생의 한 토막을 살면서 얻은 깨달음이 마치 다른 사람의 일대기를 쓰는 듯한 느낌으로 기술 돼 있다.
생물학적인 나이로 보면 박찬호는 아직 젊다. 일대기를 쓸 나이는 아닐 수 있다. 그런데 체육인들만이 얻을 수 있는 특권이 있다. 현역 선수로서의 삶은 자신의 인생과 별도로 또 하나의 기승전결을 이룬다. 전체 인생 안에서 따로 구성 되는 한 사이클을 경험할 수 있다. 경험치로만 보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에 훨씬 유리한 조건이다. 박찬호는 ‘인생 속 인생’을 사는 특권을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에 녹여 냈다.

프로야구 선수로 은퇴 선언을 한 지 두 달 여가 흐른 지난 1월, 박찬호는 출판사 관계자를 만나 “이제 지난 시간을 이야기할 준비가 됐다”며 말했다고 한다. 그는 차로 이동할 때나 잠자기 전, 틈틈이 스마트폰에 메모를 했다. 메모장은 인간 박찬호의 삶, 생각, 신념, 과거와 미래에 대한 글들로 가득했다.
그는 선수 시절부터 개인 홈페이지에 글을 써왔고 중학교 때부터 빠짐없이 일기를 써왔다. 그렇게 쓴 글과 야구를 통해 겪고 배운 것들이 ‘끝이 있어야 시작도 있다’로 탄생했다. 물론 한 권의 책으로 정리 돼 나오기까지는 출판사의 도움이 있었지만 한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삶의 가치는 고스란히 박찬호의 것이었다.
박찬호는 모든 것을 ‘최초’로 기록했다. 삼진도 최초, 안타도 최초, 홈런도 최초…. 그는 어쩔 수 없이 최초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고 쑥스럽게 고백하지만 아마추어 선수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한 그는 한국인들이 알고 있던 야구에 대한 통념을 깨버렸다. 시속 161km의 강속구로 메이저리그의 거물급 타자들을 요리하는 박찬호를 통해서 우리는 수만 관중이 모여든 화려한 경기장, 다양한 인종이 모여 만드는 환상적인 플레이를 처음 접할 수 있었다.

처음 가야 했던 그 길은 절대 쉽지 않았다. 부족한 실력, 서툰 영어, 미묘한 차별이 가져다줄 시련에 대해 귀띔해주는 이조차 없었다. 메이저리그 데뷔 기자회견 이후 18일 만에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면서부터 그는 혼자서 부딪혀야 했고, 혼자 뚫고 이겨내야 했다.
강해 보이기 위해 영어로 욕하는 연습도 해야 했다. 차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마운드에서 의사 표현을 하려면, 우선 영어로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한국말이 어색하다는 이야기까지 듣지만 모든 것이 생존 문제였던 그에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박찬호는 스스로를 ‘메이저리그의 문을 연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한국 프로야구 출신으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후배 류현진은 ‘한국 야구 검증의 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팔꿈치에 뼛조각을 간직한 채 메이저리그라는 꿈의 무대에 선 그는 우리에게 ‘가능성’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IMF 영웅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영웅답게 훌륭한 선수가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는 부담감이 커졌다.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로 이적 당시 최고액 연봉을 받으며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지만 부진에 빠지면서 심하게 좌절했다. 죽고 싶을 만큼의 괴로움이었고 고백한다. 애너하임 에인절스의 팀 벨처를 상대로 이단옆차기를 날리자 한국인은 통쾌해했지만, 정작 박찬호는 LA에서 살해 위협을 당해야 했고 그 경기를 보러 미국에 처음 온 할아버지가, 오히려 그 경기를 마지막으로 보시고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어야 했다.
‘한만두’(한 이닝 만루홈런 두 개)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다고 다들 말하지만, 그는 만루홈런을 맞은 것보다, 그날 팀을 지게 만들었다는 게 수치스러웠다고 한다. 2007년 뉴욕 메츠와 계약 이후로 한 해 한 해 어렵게 메이저리그 생활을 이어가던 그에게 우리는 연신 ‘박수칠 때 떠나라’고 했지만 그는 떠날 수 없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박찬호는 조용한 호흡 속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과거의 영광, 최고의 순간에 대한 집착과 미련을 버렸다고 회상한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자 다시 삶에 대한 불씨가 지펴졌고, 자신의 일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스스로를 ‘촌놈’ ‘지능 면에서는 마이너리그다’라고 말하는 그는 야구를 하는 기술자가 아닌, 자신만의 야구 철학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지혜롭게 선수 생활을 지속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19년의 프로 생활을 통해 롱런의 조건은 기능이 아닌 ‘지능’임을 깨달았다.
박찬호는 지난 시간 동안 한국인들이 보여준 응원과 사랑에 보답하고 싶었다. 이 책의 인세를 유소년 야구 발전을 위해 기부하는 것도 그 이유다. 무조건적인 사랑,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 그게 바로 박찬호의 진심이었다. 힘든 시절 모든 것을 내려놓고 바닥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제 그렇게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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