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미는 이제 막 이진숙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이진숙으로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함께 느꼈던 슬픈 마음,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며 배역 속에 푹 빠져있는 모습이었다. 아픔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차갑고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극을 이끌어 갔던 이진숙은 JTBC 월화드라마 ‘무정도시’가 만들어 낸 또 한 명의 스타였다.
“일단 너무 정신없이 달려와서 아쉬움도 있고, 아쉬운 만큼 잘 달려왔다는 뿌듯함도 있어요. 되게 복합적인 마음이에요. 사실 촬영은 거의 막바지에 다다랐는데 지금 이 시점에선 초심을 잃지 말자는 생각이 가장 강해요. 내가 처음 진숙이를 접하고, 어떻게 연기를 하자, 하고 생각했던 그 도전하는 각오를 잊지 말자는 생각이죠”
JTBC ‘무정도시’는 지난달 30일 20회를 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지상파 드라마들에 비해 그리 큰 빛을 보지 못하는 종합편성채널의 드라마였지만, 수많은 폐인을 양성했고,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수식어도 얻었다. 그 중 단연 돋보였던 것은 주인공 정시현 역을 맡은 배우 정경호 였지만 그 못지않게 주목을 받았던 것이 그의 옆에서 그를 단단한 사랑으로 지켜줬던 이진숙 역의 김유미였다. 거친 남자들의 세계에서 치열하게 살아온 화류계 여인 이진숙은 청순하고 지적인 이미지의 김유미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생각해보면 참 운명적으로 이 작품을 만났어요. 처음 얘기가 됐을 때만 해도 사실 반신반의했었거든요. 스스로 생각해 봐도 이런 역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괜히 해서 안 하니만 못한 그런 반응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들이 들어 고민을 많이 했죠. 그렇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배역을 만나게 될까 생각이 들었죠. 스쳐지나가는 인연으로 보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작품이었어요. 그래서 도전해보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결정했어요”

극 중 이진숙은 때로는 동생처럼, 때로는 아들처럼 믿고 의지했던 정시현을 향해 뒤늦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 당황해 한다. 그런 감정을 이해하기가 쉬웠는지 묻자 그는 “그래서 과거로 계속 올라갔다. 감독과 이야기할 때도 두 사람이 어렸을 때 어떤 사이고 어떻게 만남을 가졌는지 대본에는 나오지 않았던 얘기를 찾았다”고 전했다.
“제 생각엔 그런 것 같아요. 진숙이는 시현이를 보면서 나를 보는 것처럼 느꼈을 거예요. 그래서 같은 처지인 시현이에게 떠나라고 해요. 나처럼 불행해 질까봐 시현이가 떠났으면 좋겠는 거죠. 그럼에도 서로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건 이 바닥에 한 번 들어온 이상, 벗어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시현이를 향해 연민의 정이 느껴지는 거고, 남자로서의 로맨스 이상의 처절한, 그런 사랑을 느끼는 것 같아요. 가족 같기도 하고 복잡한 감정이죠”
이진숙을 표현하기 위해 김유미는 남자들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발휘하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카리스마의 표현은 힘을 주기보다, 오히려 빼야 한다는 말을 듣고, 대사 처리 하나하나를 할 때마다 힘을 빼는 데 집중했다.
“카리스마가 있으려면 힘을 빼야 해요. 내가 가진 힘이나 욕심 같은 걸 다 내려놓는 게 중요해요. 그런 것들을 내려놓으니까 그게 더 강해 보이더라고요”
촬영장의 분위기는 유쾌했다. 지상파 드라마 현장 보다 여러 면에서 힘든 점이 많은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고 오히려 서로에게 힘을 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작품 만들기에 열중했다. 함께 했던 배우들 중 호흡이 가장 잘 맞았던 것은 역시 진숙의 두 남자 사파리 최무성과 박사 정경호였다.
“아무래도 최무성 선배님은 되게 풀어져서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세요. 그러다 보면 상대역인 저도 같이 풀어지게 만드시는 스타일이었죠. 정말 연기를 안 하는 것처럼 하세요. 그런 걸 많이 배웠어요. 계속 저의 생각을 물어보고요. 또 너무 순수하세요. 경호는 몰입도가 상당하죠. 쉬는 시간에는 농담을 하다가도 촬영만 들어가면 눈빛이 바뀌고는 했어요”
김유미는 이 드라마에서 연기력 뿐 아니라 뛰어난 몸매로도 주목을 받았다. 화류계의 큰손으로 나오는 만큼 화려하고 몸매가 부각되는 의상이 많았고, 다른 작품에서는 선보일 수 없었던 늘씬하고 여성스러운 몸매를 마음껏 시청자들에게 자랑할 수 있었다.
“체중 감량을 했는데 그걸 보여드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일부러 옷도 의상도 신경을 많이 썼어요. 역할도 역할이지만 제 스스로도 오픈 마인드를 가지려고 했죠. 옛날에는 이건 좋고 저건 싫고, 하면서 많은 걸 따졌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뭐든 배역에 맞는다면 그걸 소화하려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래서인지 보시는 분들이 좋게 봐주셨던 것 같아요”

실제 성격도 이진숙에 가까운지를 묻자 김유미는 “전혀 다르다”며 정색을 해 보여 웃음을 줬다. 그러면서도 조금 마음에 걸렸던지 사실 일할 때만은 조금 까다로운 성격이라고 살짝 인정해(?) 보였다.
“전혀 다르죠. (웃음) 그렇지만 일할 때는 제가 좀 철두철미해요. 신경을 안 써도 되는 것까지 신경을 쓰는 버릇이 있어서 주위 사람들이 많이 피곤하기도 할 거예요. 제가 열심히 하려고 하니까요. 그렇지만 평소엔 안 그래요. 털털하고 뒤끝이 없어요”
김유미는 다음 작품 계획을 묻는 질문에 “진숙이를 먼저 좀 보내야겠다”라고 말했다. 그만큼 이진숙이라는 캐릭터에 빠져있었기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그런 김유미에게 이진숙은 어떤 의미일까?
“이진숙은 저에게 하나의 도전이었어요. 또 어떻게 보면 고통과 기쁨을 동시에 가져다 준 여자고요. 진숙이가 되기 위해 굉장히 노력을 했고, 그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또 그렇게 돼가는 과정이 동시에 너무 행복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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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준 기자 jpnews@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