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토대로 순수한 열정을 갖고 LG서 내 모든 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역시 ‘야생마’였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똑 부러진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12년이란 시간의 무게도 그에게는 가벼운 듯했다. LG 트윈스 피칭 아카데미 초대 원장 이상훈(44) 코치가 투수왕국의 토대를 마련하려 한다.
이 코치는 지난 8일 잠실구장에서 취재진과 약 한 시간 동안 인터뷰에 임했다. 코치가 이렇게 인터뷰를 갖는 것도 이례적인 일. 그만큼 이 코치의 LG 복귀는 의미가 컸다. 현역시절 이 코치는 LG 황금기를 이끈 에이스투수이자 아이콘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코치가 팀을 떠난 후 LG는 긴 암흑기에 빠졌다. 그동안 많은 LG 팬들이 이 코치의 유니폼을 입고, 이 코치의 사진을 SNS에 올린 것도, 언젠가는 이 코치가 돌아와 다시 황금기를 열어주기를 꿈꿨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코치는 이러한 시선에 단호했다. “내가 오랜만에 LG에 돌아왔다고 특별히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의미를 부여하면 방향이 어긋날 수도 있다”며 12년 만의 복귀로 본질이 흐려지는 일은 피하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성원해주신 팬들에게는 정말 감사드린다. 지금도 내 유니폼을 입고 다니시는 팬들이 많다. 내가 은퇴한지 몇 년이 지났나. 정말 행복하고 고마움을 느낀다”고 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보이면서도 “그렇다고 부담감은 전혀 없다. 못하면 잘리면 된다. 잘린 후 오라는 곳 있으면 가면 되고, 없으면 코치 안 하면 된다. 그만큼 후회 없이 하겠다. LG에서 나를 불러서 후회할 수도 있고, 잘 불렀다고 만족할 수도 있다, 어떻게 되든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고 당당함을 보였다.
이 코치를 두고 ‘카리스마’와 같은 강렬한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무뚝뚝하고 강압적인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실상은 다르다. 이 코치는 그동안 따뜻하게 선수들의 고충을 듣고, 선수들과 문제를 공유해왔다. 투수진 분위기부터 밝게 만들었다. 고양 원더스와 두산 베어스 투수들이 가장 쉽게 마음을 열었던 지도자 또한 이 코치였다. 고양 시절부터 이 코치의 지도를 반은 한 투수는 “우연히 경기 끝나고 옆에 있을 기회가 있어 궁금한 것을 여쭤봤더니 부드럽게 조언을 해주셨다. 제구가 안 된다고 하자 ‘편하게 던져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한도 끝도 없다’고 말씀하시더라. 카리스마가 있어 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너도나도 이 코치님과 터놓고 고민을 나누곤 한다”고 말했다.
이 코치 또한 이렇게 선수의 눈에 맞춰서 소통하는 것을 강조했다. 이 코치는 “‘이렇게 하자’와 ‘이렇게 해’는 말하는 입장에선 똑같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선 다르다. 코치는 선수에게 맞춰야한다. 선수에 따라선 아예 지적을 안 하는 게 효과적일 수도 있다. 가만히 있으면 직접 와서 묻는 선수도 있다”며 “코치는 선수의 성격도 잘 파악해야 한다. 기술이든 멘탈이든 그때그때 달라질 수 있다. 코치와 선수가 서로 배우는 게 필요한 시기도 있다. 서로를 잘 파악하고 오랫동안 한 길을 가야한다”고 밝혔다.
이 코치는 2015시즌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를 역임, 1년 만에 상당한 성과를 냈다. 이현호 함덕주 허준혁 진야곱 등 두산의 좌완 유망주들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고, 두산은 이들의 도약으로 투수진 붕괴를 피할 수 있었다. 이 코치에게 비결을 묻자 “선수들이 준비가 잘 됐다. 두산 2군 분위기는 너도나도 던지겠다는 분위기였다. 고졸 신인부터 1군에서 내려온 선수까지 다 그랬다. 사실 1군 선수들은 2군으로 내려가면 좀 지친다. 그런데 이런 선수들을 나름 잘 다스렸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모든 선수들에게 기회를 똑같이 주려고 노력했다. 2군 투수들에게 던지고자하는 욕심을 내게 했던 것, 1군에 자신 있게 추천해줄 수 있는 선수가 많았던 게 성과가 아닌가 싶다”고 답했다.
프로선수들에게 2군은 각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신예선수들에게 2군은 미래를 준비하고 도약을 꾀하는 자리다. 하지만 1군 선수들에게 2군행은 여러모로 불편하다. FA까지 생각하면 더 그렇다. 2군 통보는 곧 일확천금의 기회와 이별을 뜻한다. 이 코치는 “우리 때와 가장 큰 차이점은 FA 같다. 극단적으로 보면, 너무 FA만 보고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보니 팀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도 있다. 1군에서 게임수 이닝수 등을 채워야 FA가 되는 것 아닌가. 2군에 있으면서도 간접적으로 그런 것을 느꼈다”면서 “절대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돼서는 안 된다. 2군은 분위기가 계속 좋아야 한다. 1군 투수들이 2군에 내려갔다고 고개 숙이고 투정부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모두 열심히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코치가 가장 강조한 것은 ‘순수한 열정’이었다. 이 코치는 “여자야구 팀의 감독이 된 적이 있었는데 굉장히 많은 것을 느꼈다. 여자선수들, 사회인야구 선수들을 상대하면서 진짜 열정, 순수한 열정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그 때는 정말 하루에 한 번씩 놀랐다. 프로야구의 돈과 명예를 넘어서는 더 큰 열정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순수한 열정에 크게 반했었다.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토대로 순수한 열정을 갖고 LG서 내 모든 것을 발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코치는 앞으로 올해 입단한 신인투수들과 저연차 유망주들을 집중 관리한다. 기술적인 부분을 지도하는 것은 물론, 선수들이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당장 잠실구장에서 이 코치를 볼 수는 없지만, 이 코치의 아이들이 몇 년 후 LG 투수진의 중심으로 올라설 수 있다.
한편 이 코치는 코치로는 드물게 현역시절 등번호 ‘47번’을 그대로 단 것을 두고 “구단에서 주셨다. 사실 후배들이 47번을 다는 이유를 모르겠다. 저주 받은 번호다. 서승화는 나갔고 조윤준은 작년에 십자인대를 다쳤다. 봉중근도 47번 달았다가 못해서 욕먹었다. 저주 받은 번호인 만큼, 내가 다는 게 괜찮다고 본다. 내가 달아서 저주 없어지면 되지 않을까 싶다”고 당차게 말했다. / drjose7@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