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h!쎈 초점]여성을 위한 짜릿함, 부산의 새벽을 달군 로망 포르노(부산영화제 결산)
OSEN 라효진 기자
발행 2016.10.16 08: 30

포르노그래피는 유사 이래 최초로 탄생한 장르다. 목적은 오로지 관람자의 성적 자극이며, 주요 타깃은 남성이다. 카메라는 집요하리만큼 여성의 벗은 육신과 흥분에 달뜬 표정을 훑고, 마이크는 찢어지는 교성을 담는다. 그러나 남성의 얼굴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대개 포르노 속 남성은 행위의 주체이며, 관람자들로 하여금 그 몸짓에 이입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여성을 위한 포르노도 존재한다. 삽입보다는 전희에 집중하며, 여자 주인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눈빛과 손놀림을 찍는데 상당 분량을 할애하는 영화들이 일본에서 등장해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 ‘여성을 위한 포르노’라 한다면 앞치마를 걸치고 요리하거나 알아서 화장실 청소를 하는 남자가 언급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6년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로망 포르노는 가장 확실한 대안이다. 기존 포르노의 문법을 일정 부분 따르면서도 육체로 남성을 지배하는 여성들을 다수 등장시켜 전복의 쾌감을 선사했던 로망 포르노는 당초 TV의 보급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일본 영화계가 독립 제작사의 줄도산을 타개하려 만든 에로틱 무비, 핑크 영화에서 출발한다. 특히 메이저 영화사 닛카츠가 만든 저예산 성애 영화들이 로망 포르노라 불린다.

로망 포르노를 한 단어로 바꿔 말한다면 ‘자유’다. 짧은 제작 기간과 러닝타임, 10분에 한 번씩 정사 장면이 나와야 한다는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감독들에게는 완벽한 자유가 주어진다. ‘감독의 예술’이라 불리는 영화의 다양한 발전을 꾀하기에 가장 훌륭한 환경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같은 감독들이 거장으로 성장했으며, 야마토야 아츠시의 ‘황야의 더치 와이프’ 같은 출중한 서부극도 탄생했다. 와카마츠 코지의 핑크 영화들은 혁명의 열기가 가득했던 1960년대 후반을 뜨겁게 달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장르의 전성기는 비디오 보급 이후 막을 내렸다.
우리나라에도 로망 포르노를 포함한 핑크 영화들이 소개된 바 있다. 현재 메가박스 이수점으로 바뀐 씨너스 이수는 지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여성 관객들을 대상으로 한 핑크영화제를 4회에 걸쳐 개최했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여성들만 입장할 수 있던 이 영화제에서는 핑크 영화의 걸작부터 뉴웨이브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관객들을 만났다. (여담이지만, 현재는 붐을 이루다시피 하고 있는 명작 재개봉을 가장 먼저 시도한 상업 영화관 역시 이 곳이었다) 지난 5월에도 제1회 로뽀클래식 필름 페스티벌이 전국 주요 도시를 순회하며 열렸다.
올해 초 닛카츠 스튜디오는 ‘로망 포르노 리부트 프로젝트’ 시행을 천명했으며 소노 시온, 유키사다 이사오, 시라이시 카즈야, 나카타 히데오, 시오타 아키히코 등 일본의 걸출한 감독들이 이 프로젝트에 가담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 가운데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세 편은 성애 영화 속에서 노리개처럼 소비되던 여성 캐릭터들을 욕망의 주체로 승격시키는 쾌거를 보여줬다.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의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 나카타 히데오의 ‘화이트 릴리 : 백합’, 시오타 아키히코의 ‘바람에 젖은 여자’가 그 주인공들이다.
세 작품은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첫 번째 미드나잇 패션 프로그램으로 묶여 지난 7일 자정 상영되기도 했다. 김기덕 감독도 극장에 나타나 늦은 시간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즐겼다.
2016년 시작된 로망 포르노의 재건 작업에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만든 영화들이 현저히 줄고 있는 일본 영화계에서 로망 포르노의 재건이 감독들의 작가주의를 독려할 것이라는 기대가 쏠린다. 이 같은 기대감을 충족시키며 로망 포르노 부활의 시동을 건 3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1.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
후루야 신지(이타오 이츠지 분)는 한때 평단의 주목을 받은 인생작을 만들었지만, 현재는 돈이 되는 삼류 에로만 찍는 영화 감독이다. ‘사랑과 욕망의 짐노페디’는 이 남자의 일주일을 관조적 시선으로 추적하며 그에게 얽힌 기구한 속사정을 하루하루 폭로해 나간다.
오랜만에 찍는 영화는 여배우의 촬영 거부로 무산되고, 제자의 저금통을 들고 도망친다거나 이혼한 아내에게 구걸할 정도로 자금 사정이 열악하다. 그런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하는 남자들은 인기가 좋은 것인지, 주변 여자들은 유부남인데다 별볼일 없는 신세인 신지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신지의 섹스 상대는 매일 바뀌지만, 전부 중간에 멈추거나 실패한다. 영화는 바닥까지 추락한 이 하찮은 남자에게서 자존심과 권위 따위의 미명을 전부 강탈해 버린다. 그 과정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폭소가 터져 나온다.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는 영화의 시작과 끝, 그리고 신지와 여성들의 정사 장면 위를 흐른다. 죽어가는 아내가 건강할 때 연주하곤 하던 이 곡은 신지를 너절하게 만들면서도 그로 하여금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장치다. 한 남자의 행복과 불행을 유려한 멜로디와 병치시킨 영민한 설정이 돋보인다.
#2. 시오타 아키히코 감독, ‘바람에 젖은 여자’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된 세 편의 로망 포르노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작품이다. 남자는 어찌 된 영문인지 수레를 끌고 걷다가 버려진 의자를 싣고, 여자는 그의 옆에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나서는 그대로 물에 빠져 버린다. 이 기괴한 만남 이후로 여자는 남자와 ‘한 번 하기 위해’ 매달린다. 남자 코스케(나가오카 타스쿠 분)와 여자 시오리(마미야 유키 분)는 섹스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격렬한 몸싸움을 벌인다.
코스케는 잘 나가는 극작가였지만, 각종 치정에 휘말렸던 과거를 잊기 위해 산 속에서 산다. 그런 코스케에게 밑도 끝도 없이 들개처럼 덤벼드는 시오리는 귀찮고 짜증나는 존재다. 동네의 마돈나인 시오리는 보란 듯이 코스케 앞에서 남자들과 섹스를 하거나, 한밤 중 전화로 산짐승들을 깨워 코스케를 곤란하게 만든다. 애써 시오리를 무시하려던 코스케도 자극이 계속될수록 감정이 움직이는 것을 느낀다.
그러던 중 시오리는 극작가인 코스케에게 돌연 배우를 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다. 흥미가 생긴 코스케는 봉 하나를 두고 시오리와 싸움 같은 연기 연습을 한다. 이 순간 두 사람 사이의 성적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된다. 코스케는 그제야 시오리를 받아 들이려 하지만, 여자는 “아직 때가 아니”라며 남자를 밀어낸다.
영화에는 제목처럼 ‘바람에도 젖을’ 여자들이 나와 활기 넘치는 육신과 정욕만으로 모든 남자들을 노예로 만든다. 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코스케 역시 마찬가지였다. 러닝타임의 절반을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닌 수많은 정사 장면에서 이들은 언제나 주체다. 들개처럼 목표물을 물어 뜯고, 그러고 난 후에는 뻗어 버린 남자들을 두고 미련 없이 돌아설 따름이다. 격렬한 섹스에 무너져 버린 오두막처럼 코스케가 시오리에 함락되는 수순은 단순한 성적 자극 이상의 유쾌함을 선사한다.
#3. 나카타 히데오 감독, ‘화이트 릴리 : 백합’
여성과 여성의 로맨스가 담긴 작품을 속칭 ‘백합물’이라 부른다. 나카타 히데오 감독의 ‘화이트 릴리 : 백합’은 제목부터가 확실한 레즈비언 로맨스다. 도예가 도키코(야마구치 카오리 분)는 비 오는 날 버려진 고양이처럼 집 앞에 앉아 있던 여고생 하루카(아스카 린 분)을 거둬 제자로 키운다. 두 사람의 은밀한 관계는 하루카가 도키코의 원피스 지퍼를 입으로 올려 주는 첫 장면부터 드러난다.
두 사람은 연인도, 단순 사제간도 아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도키코는 매일 밤 집으로 남자를 데려와 섹스를 하고는 “오늘도 불완전 연소다”라며 하루카에게 성적 봉사를 요구한다. 하루카는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관계하는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다가도 도키코를 기쁘게 받아들인다. 하루카의 마음을 알고 있는 도키코는 언제나 제멋대로다.
어느날 도키코의 아틀리에에 사토루라는 젊은 남자가 들어온다. 도키코는 남자의 훤칠한 육신에 끌렸고, 결국 그를 유혹하는 데 성공했으며, 전에 없던 큰 만족을 느낀다. 이제 도키코는 하루카를 찾지 않는다. 그 때부터 두 여자와 한 남자의 묘한 동거가 시작된다.
사토루는 도키코의 끝없는 욕망을 채워주면서도 하루카에게 관심을 보인다. 그러던 중 도키코를 향한 하루카의 마음을 알게 된 사토루는 주인과 노예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들의 비정상적 관계에 의문을 던진다. 하루카는 사토루와의 대화를 통해 도키코를 사랑하는 자신을 동정하며 괴로운 시간들을 보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러나 도예와 도키코가 곧 인생이던 하루카는 쉽사리 이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도키코는 사토루가 하루카의 지고지순한 마음에 반했음을 눈치채고 끔찍한 상황을 만들어 이들을 괴롭힌다. 결국 사토루의 여자친구까지 끼어든 이 망측한 치정극은 피를 보고야 끝을 맺는다. ‘화이트 릴리 : 백합’은 극 중 인물들의 감정은 물론 육체까지 극단으로 몰아 붙이며 뒤틀린 사랑의 한 단면을 전시한다.
이 영화는 적확한 이미지의 활용으로 신선한 시각적 자극을 준다. 도키코와 하루카의 정사 장면에 등장하는 순결한 백합의 이미지가 그렇고, 손가락을 섬세하게 사용해야 하는 도예를 주인공들의 직업으로 설정한 점이 그렇다. 보는 이들의 정신을 압박하는 서사 가운데서도 스스로 아틀리에를 박차고 나가며 심신의 해방을 얻는 하루카의 성장이 숨 쉴 틈을 준다. /bestsurplus@osen.co.kr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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