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과 함께 은퇴하게 됐다".
‘라이언킹’ 이동국(전북)이 은퇴기자회견을 열었다. 28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이동국은 선수 생활 마무리를 앞둔 소감을 전했다.
이동국은 "단장님과 코치님께서 꽃다발도 준비해 주셨고 많은 분들께서 찾아 주셔서 행복하게 은퇴할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많은 분들께서 부상 때문에 은퇴한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부상 때문에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 정신이 몸을 지배한다는 생각으로 선수들에게 이야기 해왔다. 그 생각으로 선수생활을 해왔다. 부상을 당한 뒤 많은 생각을 하게됐다. 예전에는 부상을 당한 뒤에도 다시 일어섰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매일 조급한 마음이 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불안한 모습이 나왔다. 사소한 부분에 서운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은퇴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몸이 아픈 것은 있었지만 정신이 나약해 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1998년 포항에서 프로에 데뷔한 이동국은 그해 프랑스 월드컵에서 자신감 넘치는 슈팅을 선보이며 스타덤에 올랐으나, 유럽 무대 적응 실패와 월드컵 대표팀 합류가 연이어 불발되며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2009년 전북에 입단한 뒤 전북의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우승(1회)과 K리그 우승(7회)을 이끌며 K리그를 호령했다.
이동국은 K리그 역대 최다 최우수선수(MVP) 수상(4회), 최다 득점(228골), 최다 공격 포인트(305개) 등 다양한 기록을 세우며 K리그의 살아있는 전설로 자리매김했다.
◼︎ 다음은 이동국 일문일답
- 은퇴를 결정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 부상으로 나약해진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 후 결정하게 됐다. 항상 긍정적이고 좋은 생각만 하던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들고 조급해 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서 운동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삶이 기다린 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게 됐다. 그만해도 될 때라는 생각을 했다. 울산전을 앞두고 구단과 감독님과 코치님께 말씀 드렸다. 중요한 경기이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왔을 때 말하고자 했다. 울사전을 마친 뒤 이야기를 꺼냈다.
- 지금 드는 생각은.
▲ 주위에서 많이 연락을 주셨다. 1년 더해도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래서 경쟁력 있는 상태에서 은퇴할 수 있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많은 분들을 만날 기회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 가장 기뻤던 일과 슬펐던 일은.
▲ 프로 유니폼을 처음 받았을 때 가장 기억이 난다. 포항에서 등록이 되지 않았던 '33번' 유니폼을 선물로 주셨을 때 정말 기뻤다. 며칠동안 잘 때도 입고 있었다. 정말 기억에 남는 일이다. 당장 생각나는 것만 말한다면 2009년 처음 전북에 와서 우승컵을 들었을 때가 기억에 남는다.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라면 2002년 월드컵을 뛰지 못했을 때다. 항상 기억을 하며 살고 있다. 늦게까지 운동을 하게 된 것 같다. 잊지 못할 기억이다. 지금까지 선수생활을 할 수 있었던 계기다. 항상 좋은 기억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2006년 월드컵을 2달 앞두고 다쳤을 때도 기억난다. 모든 것을 걸고 준비했다. 경기력은 가장 좋았을 때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골은.
▲ 다 소중하다. 많은 분들께서 기억하시는 것은 김상식 코치님과 함께 뛸 때 넣었던 골이다. 불분명한 슈팅으로 골을 만들었던 독일과 평가전 득점이다. 아직도 생생하게 볼의 궤적이 생각난다.
- '봉동이장' 최강희 감독님과 기억은.
▲ 은퇴를 할 때 쓸쓸하게 떠나는 선수들이 많다. 은퇴 기자회견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 분이다. 전북 현대라는 팀을 함께 만든 분이다. 내가 모르고 있던 나의 기량을 끌어내 주신 분이다. 항상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30대 중반 지난 뒤 은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 이번에도 선수들에게 말했을 때 믿지 않았다. 현실로 이뤄질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멀리 내다보지 않고 항상 신경을 쓰면서 지내온 것이 좋은 기억인 것 같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못한다는 생각 보다는 선수들과 모든 것을 함께 했다. 제 나이를 모르면서 살아온 것 같다. 지금까지 나이를 모르고 살아왔다.
- 좌절했던 기억을 가진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 저 보다 더 큰 좌절을 한 분들도 있다. 지금 내가 가진 좌절은 다른 사람들 보다 행복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것을 이겨내는 힘이 생긴 것 같다.
- 후배들에게 남겨주고 싶은 이야기는.
▲ 선후배를 떠나 프로 선수라면 경쟁을 해야 한다.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경쟁서 승리하려면 특별하게 자신의 장점을 내세워야 한다. 단점을 보완하기 보다는 자신이 가진 장점을 극대화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따라오지 못하게 만든다면 프로 선수로 성공할 수 있는 것 같다.

- 최고의 동료는 누구인가.
▲ 너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23년간 함께 했던 선수들이 정말 많다. 베스트 11을 선정하는 것은 어렵다. 김상식 코치님도 계신다. 2000년 부터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전북에 와서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김상식 코치님을 꼭 포함되어야 한다. 2009년 멤버들이 정말 기억난다. 에닝요, 루이스, 최태욱 등 기억에 남는다. 우승할 수 없다는 평가를 받던 선수들과 정상에 올랐다. 정말 강력한 공격진이었다.
- 전북 그리고 전주에 대한 의미는.
▲ 고향인 포항에 가면 네비게이션으로 이동해야 한다. 전주는 오히려 그렇지 않다. 전주에서 얻은 것이 정말 많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운동을 하면서 전북 팬들의 함성과 평상시에 만났던 팬들을 보면 끈끈한 묘한 매력을 받았다. 전주라는 것은 제 2의 고향으로 기억될 것이다.
- 마지막 대구전.
▲ 우승을 위해서는 승점을 가져와야 한다. 우승컵을 들고 내려온다면 그것이야 말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정말 기대된다. 은퇴할 때 선수들이 대부분 울고 있다. 기쁨의 눈물이라면 울것이다. 공식적인 것은 대구전을 마지막으로 마무리 할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하기 때문에 FA컵 2차전은 고민해야 할 일이다. 코칭 스태프의 결정을 기다려야 한다.
-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은지.
▲ 1998년 IMF 시기에 프로에 데뷔해서 해외 전지훈련을 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무산됐다. 지금은 코로나19 시대라서 비슷하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서 정말 이슈가 됐고 화려하게 등장했다. 팬들도 그렇고 정말 기뻤던 순간이다. 2000년에 브레멘에 진출해서 성공하지 못했지만 도전을 한 것은 가치 있던 일이었다. 2002년 월드컵에 무조건 출전할 것이라는 이동국이 나서지 못했기 때문에 실망스러웠다. 다시 일어설 수 있던 경험이었다. 2003년 군입대 후 정신적으로 무장이 된 후 나왔다. 2006년 독일 월드컵만 바라보고 뛰었다. 다시 하라면 못할 정도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힘든 것을 이겨냈지만 아픈 기억이다. 당시 뛰었다면 어떤 경기력을 보여줬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십자인대 수술을 한 뒤 1~2년 플레이를 뛰고 해외진출을 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성남의 기억은 많지 않다. 여러분께서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것 같다. 그리고 2009년을 시작으로 8개의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정말 화려했던 시간이었다.
- 등번호 20번.
▲ 홍명보 선배님께서 물려 주셨다. 마지막 경기가 될 때까지 달고 있다. 정말 잊혀지지 않는 등번호다. 최보경이 등번호를 탐내고 있다. 달게 되면 욕을 먹을 것이라고 이야기 해줬다. 후배들이 가지고 싶던 등번호라는 이야기에 대해 정말 고맙다. 어린 선수들에게 그런 생각을 심어준 것이 정말 고맙다. 전북에서의 20번은 구단에서 키우고 있는 선수들에게 물려줬으면 좋겠다. 내년에 대한 기억은 없다. 무엇을 할 때 행복하고 잘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쉬면서 고민하고 싶다.
- 가장 오랜시간 칭찬과 비난을 받은 선수다.
▲ 저의 은퇴에 대해 좋아하는 분들도 있으실 것이다. 안티팬들도 팬으로 만들고 싶어서 더 열심히 뛰었다. 더이상 축구 선수 이동국은 보실 수 없으실 것이다. 수고했다는 박수를 쳐주셨으면 좋겠다.
어젯밤에도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님께서도... 은퇴를 하시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프로 생활 23년 이라고 하지만 아버님과는 평생 함께 해왔다. 본인도 은퇴 하시겠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정말 가슴 찡했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부모님께도 고생하셨다고 말씀 드리고 싶다.
우리 아이들은 좋아한다. 함께 할 시간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함께 보고 싶었다.
- 전북을 이끌어 갈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전북이 새롭게 찾아야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재성-김민재가 나와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능력을 가진 선수들이 많다. 전북은 함께 해야 강한팀이다. 굳이 찾기 보다는 원팀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지도자 준비는.
▲ 당장 지도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결정하지 않았다. 다만 지도자가 된다면 여전히 고민해야 할 문제다.
- 가장 기억에 남는 기록은.
▲ 많은 기록이 있는 것 같다. 대표팀 포함 800경기 이상 뛴 것을 오늘 아침에 확인했다. 선수 개인이 800경기 이상을 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꾸준함을 가져왔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것 같다. 정말 많은 경기를 소화할 수 있었다. 좋은 경기력으로 경기를 뛰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후배들도 기록을 깨기 어려울 것 같다. 전북에서 200골을 넣었던 것이 가장 최근이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다. 한 팀에서 200골을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 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은.
▲ 최고의 몸 상태에서 진출해도 성공 가능성은 높지 않다. 십자인대 수술한 뒤에 나섰던 상황은 어려웠다. 2006년도의 몸 상태를 유지하고 진출했다면 달라졌을 것 같다. 그 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도전할 생각이다. 도전을 했기 때문에 지금도 이야기 할 수 있는 것 같다. 지금 선수들은 적응하는게 더 수월한 것 같다. 당시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 좋은 공격수로 나오려면 어떤 것이 필요할까.
▲ 공격수로 살아남기가 어려운 시대가 됐다. 모든 팀들이 외국인 공격수를 선발하고 있다. 성적 때문에 어쩔 수 없다. 22세 이하 규정도 있어 젊은 선수들이 기회를 받고 있지만 외국인 선수들과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공격수가 1순위였다면 지금은 후배들이 측면과 미드필더로 준비하는 선수들도 있다. 선수들도 문제가 있겠지만 구단을 비롯한 축구계에서도 좋은 선수를 키울 수 있도록 출전 시간을 보장해 줘야 한다. 나 조차도 실력에 비해 더 기회를 많이 받았다. 그렇게 실력이 생겼다. 앞으로 5~10년 안에는 대형 스트라이커가 나올 것 같다. 45세 이상 규정이 생긴다면 뛸 생각이 있다.
- 아내의 마지막 위로.
▲ 은퇴를 결심하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1년 더 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도 했다. 경쟁력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집사람이 여러가지 이야기를 해줬다. 항상 집사람에게 이야기 한 것은 몸이 아픈 것은 참겠지만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람도 그 부분에 이야기를 해줬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 마무리는 언제나 해피엔딩이 되야 한다고 이야기 했다. 각본이 정해진 것처럼 흘러가는 것 같다. 우승컵을 들고 은퇴할 수 있는 선수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 주인공이 나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 마지막 인사는.
▲ 축구를 하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랑을 보내 주셨다. 축구 선수 이동국으로 성장하게 해주신 지도자님들께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축구 선수 이동국을 쓸 수 없는 것은 아쉽다. 전 축구 선수 혹은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에 대해 준비가 안된 것 같다. 응원해준 팬들, 정말 과분한 사랑을 주셨다. 마지막 경기도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다. 골을 넣는 스트라이커로 남고 싶다. 정말 감사드린다. / 10bird@osen.co.kr
[사진] 전주=민경훈 기자 rumi@ose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