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나와 엉킨 인연의 허정무는 왜 38년 만에 월드컵 무대에 소환됐을까? [최규섭의 청축탁축(清蹴濁蹴)]
OSEN 우충원 기자
발행 2024.04.04 08: 36

38년 만이다. FIFA(국제축구연맹)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날을 되살렸다. 디에고 마라도나(아르헨티나)와 엉켰던 연(緣)은 세월의 흐름을 뛰어넘어 불쑥 다시 나타났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FIFA 월드컵 ‘추억의 장’에 소환된 그는 누구일까?
1986 멕시코 FIFA 월드컵 때 ‘태극 전사’로서 꺾일 줄 모르는 투혼을 불태워 ‘악바리’, ‘악착이’라는 별명을 얻은 허정무다. 32년 만에, 두 번째 월드컵 본선 마당을 밟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축 미드필더로서 ‘용맹’을 떨친 그때의 모습이 한 장의 사진으로 다시 선명하게 다가왔다.
당시 중천에 떠오르며 세계를 주름잡던 마라도나의 위명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몸을 날려 맞섰던 억척스러움이 그대로 배어남이 느껴진다. 1986년 6월 2일(이하 현지 일자), 그룹 스테이지 A조의 막을 열었던 한국-아르헨티나전(1-3 패)에서, 마라도나의 활동 반경을 좁히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으며 반칙마저도 마다하지 않았던 투쟁심은 우리나라 팬들에게 얼마나 깊은 인상을 남겼던가. 비록 세계의 많은 언론 매체는 ‘태권 축구’라는 말로 비아냥거렸지만, 굽힐 줄 모르는 투혼만큼은 분명 돋보였다.

[사진] ⓒGettyimages(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상대 수비수가 반칙을 범하지 않는 한 막을 수 없었던 선수, 디에고 마라도나다.”
FIFA가 마라도나를 예찬하며 첫머리에 내세운 표현이다. “앞으로 역대 월드컵에서 세워진 대기록을 하나씩 반추하는 시리즈를 누리집에 게재하겠다”라고 밝힌 FIFA가 첫 번째 주인공으로 마라도나를 선정한 배경을 압축한 한마디다.
그리고 이 표현에 걸맞은 상징적 순간으로, 허정무의 몸을 날린 저지에 비명을 내지르는 마라도나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대표적으로 실었다. 사실, 한국 팬에게도 무척 낯익은 사진이다. “악바리 악돌이 악쓴다”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굴하지 않고 끈질겼던 한국 축구의 투혼을 대변해 온 사진이었다.
마라도나, 메시 멀리 따돌리며 역대 FIFA 월드컵 파울 유도 최고 기록 세워
그렇다면, 과연 마라도나는 FIFA 월드컵 무대에서 반칙과 관련한 어떤 최고 기록을 남겼을까? 다름 아니라, 반칙을 당한 횟수였다. 2위는 감히 범접할 수도 없는 엄청난 격차로 최고위에 오른 마라도나다. 파울을 유도하는 능력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좀처럼 감을 잡기 힘듦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상대하는 수비수로선 파울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말이다.
마라도나는 세 번의 월드컵에 출전했다. 1982 스페인 대회부터 1986 멕시코 대회를 거쳐 1990 이탈리아 대회까지 잇달아 본선 무대에서 돋보이는 연기를 펼쳤다. ‘La Albiceleste (라 알비셀레스테·하양-하늘: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 별칭)’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하며 우승(멕시코 대회)과 준우승(이탈리아) 각 1회의 빼어난 전과를 올렸다. 등정을 이룬 멕시코 대회에선, 골든볼(최우수 선수)까지 석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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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번의 월드컵 대회에서, 마라도나가 끌어낸 파울은 총 125개에 - 스페인 대회 36개, 멕시코 대회 53개, 이탈리아 대회 36회 - 이른다. 마라도나가 활약하던 시절인 1980년대만 하더라도 공격수에 가해지는 파울 빈도가 요즘처럼 높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굉장한 개수임을 쉽게 읽을 수 있다.
같은 조국의 후배로서 2위에 오른 리오넬 메시와 대비하면 그 엄청남을 금세 실감한다. 75회 반칙을 당한 메시의 167%에 이르는 수치다.
반칙과 관련해 마라도나와 가장 악연으로 엮인 인물은 이탈리아의 클라우디오 젠틸레다. 스페인 대회 2차 그룹 스테이지 이탈리아-아르헨티나전(2-1 승)에서, 젠틸레는 마라도나를 대인방어하며 물경 23회의 반칙을 범했다. 불명예스러운 기록의 희생양이 된 젠틸레다. 파울 기록을 집계한 1962 칠레 대회 이래 역대 월드컵 역사상, 한 경기에서 한 선수에게 7회 이상 반칙을 저지른 적은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듯싶은 무시무시한 반칙 기록을 세운 젠틸레는 경기 후 명언(?)을 남겼다. “축구는 발레리나를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다.”
마라도나를 반칙으로 저지하고 싶어도 뜻을 이루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이 맥락에서, 멕시코 대회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와 맞붙어 불운의 쓴잔(1-2 패)을 마신 잉글랜드의 센터백 테리 버처의 말은 음미할 만하다.
“우리는 마라도나를 발로 걷어차야 한다는 공감대를 이뤘던 듯싶다. 그러나 문제는 마라도나는 쓰러뜨리기도 매우 어려운 선수였다는 점이다.”
결국, 잉글랜드는 마라도나를 막지 못하고 패퇴의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FIFA 표현대로라면, 이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20세기 최고의 골”을 뽑아내며 ‘신의 손’으로 자리매김했다.
허정무는 지도자로서도 마라도나와 만나 승패를 겨뤘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그룹 스테이지에서 다시 힘을 겨뤘는데, 1-4로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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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마라도나를 되돌아본 허정무의 말이다.
“내가 반딧불이라면, 마라도나는 태양이었다. 선수로서 누구보다 존경할 만했다. 공이 발에 붙어 다니는 듯한 빼어난 드리블 솜씨는 다시 돌이켜 봐도 일품이었다. 패스하는 시야도 무척 탁월했다. 키는 작지만 탄탄한 체격과 생고무 같은 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축구 지능은 의심할 나위 없는 세계 으뜸이었다.”
전 베스트 일레븐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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