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K금융그룹은 "한국 프로배구가 기로에 섰다. 최윤 OK금융그룹 회장이 주말경기•외국인 선수 확대, 개인 보수 상한제·호크아이 도입 등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했다"고 알렸다.
프로야구·축구·농구 등 주요 종목들이 일제히 반등에 성공하는 동안, 배구만은 그 흐름을 타지 못했다. 관중은 줄고, 시청률은 내리막을 걷고, 국제무대에서는 연패가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 선수 연봉만 해마다 가파르게 올랐다. 외형적 수치와 현장의 온도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는 상황이 수년째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 냉엄한 위기 앞에, 마침내 한 배구단 구단주가 오랜 침묵을 깨고 작심하고 나섰다.

배구계에 따르면, 최윤 회장은 지난 10일 한국배구연맹(KOVO) 총재 및 총재추천위원회 앞으로 '한국프로배구 리그 경쟁력 제고를 위한 주요 정책과제 제언의 건'을 공식 문서로 접수했다.
단순한 의견 개진이 아닌, 구단 직인이 선명하게 찍힌 공문 형식의 이 제언서는, 한국 배구의 위기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구단주로서의 절박한 위기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최후 통첩'에 가까웠다.
제언서 서두에서 최윤 회장은 최근 한국 프로배구가 직면한 현실을 냉정하게 진단했다.
"현재 프로배구는 국제대회에서의 부진, 스타 플레이어 부족 등으로 인하여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고, 관중수, 시청률 상승이 저조해지는 등 총체적인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기 총재를 비롯한 새로운 집행부의 혁신적인 변화와 적극적인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야구는 경기당 1만 7천명, 배구는 2천명"... 수치가 말하는 한국 배구의 '냉정한 현주소'
무엇보다 객관적인 지표를 통해 한국 배구가 처한 위기를 직시했다.
지난 2025년 KBO리그는 총관중 1,231만여 명, 경기당 평균 1만 7101명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다.
반면 같은 시기 V-리그(2025-26시즌)의 경기당 평균 관중은 남자부 약 2272명, 여자부 약 2465명에 머물렀다. 야구의 8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관중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계권료, 즉 '프로스포츠의 가치, 리그의 몸값'을 보면 격차는 더욱 뚜렷하다.
KBO는 지상파 3사와의 TV 중계방송권 계약으로 연간 540억 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여기에 뉴미디어 중계권 연간 450억 원이 더해지면 중계권에서만 연간 990억 원이 발생한다.
하지만, OK저축은행 구단이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KOVO의 연간 중계권료는 KBO에 5% 수준에 불과한 50억 원 수준이다. 10개 야구단과 7개 배구단의 구단수가 다르다고 해도 납득하기 어려운 간극이다.
K리그(프로축구) 역시 쿠팡플레이와 뉴미디어 단독 계약으로 3년 총액 640억 원을 확보했고, KBL(남자프로농구)도 CJ E&M과 계약해 연간 40억 원대를 받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2022년부터 관중 제한이 풀리며 프로야구·축구·농구 등 타 종목은 일제히 반등에 성공했다.
그런데 배구만은 제자리걸음이다. 배구만이 이 흐름에서 홀로 뒤처진 것이다.
다만, 지난 시즌 부산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OK저축은행의 관중몰이 효과가 배구계 전체의 평균 관중수 반등을 뒷받침해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팬 친화 정책이 실제로 통한다는 것을 현장에서 직접 증명한 셈이다.

‘144 vs 36경기’... 흥행의 벽은 결국 '경기 수 부족'
최윤 회장이 배구 흥행을 가로막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으로 꼽은 것은 '경기 수'의 절대적 부족이다.
현재 V-리그는 팀당 36경기(6라운드) 체제다. KBO(144경기)는 물론, KBL(54경기), K리그1(38경기)과 비교해도 현저히 낮다. 일본 SV리그(44경기)와 견줘도 뒤처진다.
"경기가 없으면 팬도 없다. 팬이 없으면 광고도 없고, 중계권도 없고, 결국 리그도 없다"
최윤 회장의 논리는 단순하지만 명쾌하다. 향후 3년간 경기수를 단계적으로 늘릴 것을 제안했다. 36경기(6R) → 42경기(7R) → 48경기(8R) → 최종 54경기(9R)까지 확대하는 로드맵이다.
또 경기수 확대와 함께 '주말 중심 편성'의 시급성도 강하게 제기했다. 근거는 KOVO에 공시된 2025-26시즌 관중 데이터다.
주말 관중은 평일 대비 남자부 +140%, 여자부 무려 +170% 높게 달했다. 남자부 전체 평균 관중은 평일 1,985명에서 주말 경기에는 무려 2,806명으로 뛰어올랐고, 여자부는 평일 1,945명에서 주말 3,308명으로 껑충 뛰었다.
배구 경기장에서 만난 한 팬은 "평일 퇴근시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가기 어렵다. 마음 편한 주말에 경기장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데이터와 현장의 목소리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최윤 회장은 "리그 개막전 주말경기 편성을 의무화하고, 토·일요일 남녀 각 2경기씩 총 4경기 동시 진행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중계권 계약시 전 경기 중계조건을 사전 협상의 전제로 삼을 것도 제안했다.
990억 vs 50억, '중계권 저평가' 초래하는 통합 계약, 이제는 바꿔야
중계권 문제의 핵심은 금액이 아니라 구조에 있다는 게 최윤 회장의 진단이다.
현재 KOVO는 TV 중계권과 뉴미디어권을 한 방송사에 통합·독점 계약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협상력은 없고 금액은 매년 제자리를 맴도는 이유다.
반면 KBO는 지상파 TV 중계권과 뉴미디어권을 분리해 경쟁 입찰방식으로 판매한다.
그 결과, 기존 3년 총액 1,350억 원 수준이던 뉴미디어 계약을 2027년부터 연간 900억원 규모로 갱신하는 우선협상을 타결지었다. 이전 계약의 정확히 2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인기 스포츠의 후광 효과도 있지만, 전략적인 경쟁 입찰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다. 배구는 그 반대 길을 걷고 있다. 독점 구조 속에서 협상력은 없고, 금액은 매년 제자리인 실정이다.
최윤 회장은 "경쟁 없는 독점 계약 구조로는 중계권료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며, 경쟁을 통한 중계권료 현실화를 주문했다.
리그 경쟁력이 올라가면 미디어의 관심도 따라온다. 그 선순환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 판매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인 선수 확대 통한 ‘리그 경쟁력’ 강화... 일본 SV리그 성공이 입증한 흥행 공식
V-리그의 질적 도약을 이끌 핵심 카드로는 '외국인 선수 제도의 전향적 개편'을 제안했다.
현재 V-리그는 팀당 외국인 선수 1명, 아시아쿼터 선수 1명, 총 2명만 보유할 수 있다. 이를 3~4명까지 확대하자고 제안하며, 일본 SV리그의 성공 사례를 근거로 들었다.
일본은 2023-24시즌 외국인 2명(외국인1+아시아1) 체제에서 출발해 24-27시즌 3명(외국인2+아시아1), 27-28시즌 4명(외국인3+아시아1)으로 단계적으로 늘리는 로드맵을 실행 중이다.
결과는 분명했다. 외국인 선수 확대 이후 관중수가 무려 175% 증가했다. 수준 높은 외국인 선수가 들어오자 경기의 질이 획기적으로 올라가면서, 자연스레 팬들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최윤 회장이 제시한 안은 두 가지다. 3명 보유(외국인 1·아시아 2)에 통합 샐러리캡 70만 달러 이내를 적용하는 방안과 4명 보유(외국인 2·아시아 2)에 110만 달러 이내 자율 운영을 허용하는 방안이다.
구단이 팀 컬러와 예산에 맞게 외국인 구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유연성을 부여하자는 취지다. 경기의 재미가 올라가면 팬들은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팬이 모이면 중계권료가 오른다. 최윤 회장이 그리는 선순환의 출발점이 바로 '경기의 질'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외국인 선수 확대인 것이다.
남자부 ‘개인 보수 상한제’ 도입... 시장 과열 방지 시급
리그 재정의 건전성과 직결된 민감한 현안도 최윤 회장은 피해가지 않았다.
현재 여자부에는 개인 보수 상한제가 시행 중이다. 25-26시즌 기준 개인 상한은 8.25억 원이며 26-27시즌부터는 5.4억 원으로 더 낮아진다.
반면 남자부는 개인 상한 기준 자체가 없다. FA 시장이 과열되면서 특정 선수에게 연봉이 집중되고, 나머지 선수들과의 격차가 극심해지는 구조가 고착화된 결과다.
최윤 회장은 2027 시즌부터 개인 상한 10.42억 원을 출발점으로 삼아 연간 4천만 원씩 단계적으로 낮춰, 2029-30시즌에는 9.62억 원까지 조정할 것을 제안했다.이 사안은 돈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남녀 선수 간 연봉 차별에 관한 진정을 접수해 조사 중이고, 문화체육관광부 체육국 스포츠산업과와 국회 성평등가족위원회에서도 심도 깊게 검토가 진행 중인 사안이다. 배구계 스스로 강력한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정부 규제로 강제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이미 울리고 있다.
호크아이·AI 판독·FIVB 기준 적용... "공정성 회복 없이는 팬심도 없다"
스포츠에서 공정성은 팬들과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흔들리는 순간, 팬들은 조용히 등을 돌린다.
최윤 회장이 공정한 경기 운영을 위한 인프라 혁신을 강하게 요구하고 나선 이유다.
최윤 회장은 국제배구연맹(FIVB) 기준과 다른 일부 로컬룰을 전면 폐지하고 FIVB 기준으로 통일할 것을 촉구했다.
호크아이 또는 AI 판독 시스템 도입을 통한 판정 오류 최소화, 심판 육성·평가 제도 강화, 외국인 심판 도입 및 FIVB 주관 심판 교육 실시도 함께 제안했다.
테니스 그랜드슬램에 호크아이가 도입된 이후 판정 불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배구만이 이 흐름에서 홀로 뒤처질 이유가 없다는 지적이다.
유소년 육성·국제대회 출전 확대... 10년 뒤를 내다본 구조적 재건 제언
최윤 회장의 제언은 단기 처방에 그치지 않는다. 10년, 20년 뒤를 내다본 구조적 재건안도 담아냈다.
구단 연고지 유스 시스템 구축과 신인 드래프트 연고지 우선 지명제 마련을 통해 지역 팬덤을 키우고, 지역 유망주를 연고 구단이 발굴·육성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 핵심이다.
한·중·일 클럽 챔피언십 등 국가 간 클럽 대회 출전 활성화를 통한 국제 경쟁력 강화 방안도 함께 담겼다.
국내 리그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동시에 국제 무대에서의 존재감을 키워야 한국 배구의 브랜드 가치도 비로소 오를 수 있다는 인식에서다.
창단 13년 만의 '작심 발언'…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최윤 회장은 지난 2013년 창단 직후 2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할 만큼 선수 육성과 구단 운영에 아낌없이 투자하고, 리그의 흥행을 위해 다양한 시도를 주저하지 않은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런 그가 창단 13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적인 제언서를 KOVO에 발송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이례적이라는 것이 배구계 평가다.
한국 배구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프로구단 구단주가 공문 형식으로 KOVO에 공식 제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례적인 일"이라며 "그만큼 현장에서 느끼는 위기감이 임계점에 달했다는 방증"이라고 강조했다.
한국 배구의 골든타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차기 집행부의 선택이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주목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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