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프로야구에서 경기가 중단되었던 이유와 소요시간을 찾아 따로 정리해보자는 생각을 갖고 과거 기록지를 뒤적거리다 보니 참으로 그 이유도 많고 사정도 가지가지다. 새삼 기억이 새록새록 샘솟는 부분도 있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전혀 생소한 구석도 보인다. 이유야 어떻든 그 모든 일들이 프로야구 역사 속의 한 줄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제 와 돌이켜보면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진작에 해마다 정리를 해놓았더라면 수월했을 텐데 왜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이번 겨울 내내 기록원들이 애써 그 자료를 정리하고 나면 과거 속에 묻혀있던 사건들 속에서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남은 얼굴을 마저 보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필자 역시 수많은 중단 사유를 경험하고 기록해왔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하나를 골라보라면 2003년 9월 27일, 사직에서 열렸던 롯데와 삼성의 경기를 주저 없이 꼽곤 한다. 이날 경기에서 세워진 ‘1시간 34분’의 프로야구 최장 중단시간이라는 숫자적 의미도 물론 포함되어 있지만, 그러한 물리적인 시간 보다는 그 내용물이 시사하는 바가 아주 컸기 때문이다. 그 날 초미의 관심사는 이승엽의 홈런이었다. 일본프로야구 왕정치의 시즌 최다 홈런기록(55개)과 타이를 기록하고 있던 이승엽이 새로운 신기록인 56호를 과연 때려낼 수 있는가, 있다면 그 시점은 언제일까에 온 국민의 관심사가 집중되어 있던 시기였다. 이승엽에게 남은 시즌 경기수는 이날 경기를 제외하면 5경기. 사태는 경기가 종반으로 치닫던 8회에 터지고 말았다. 삼성이 4-2로 앞서던 8회초, 1사 2루 상황에서 이승엽은 팬들이 가지고 들어온 셀 수도 없을 만큼의 수많은 잠자리채의 너울 속에서 타석에 들어섰다. 이날 경기의 마지막 타석이었다. 하지만 가득염-최기문 배터리는 팬들의 고성과 야유 속에도 기어코 이승엽을 고의4구로 거르는 도발(?)을 감행했고, 이에 격분한 팬들은 장내로 잠자리채를 비롯한 오만가지 도구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장내 아나운서는 즉시 자제해줄 것을 호소했지만 그럴수록 팬들의 동요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까지 몰리고 있었다. 급기야 롯데구단의 단장까지 나서서 장내방송을 통해 단단히 성이 난 팬들을 진정시켜보려 애썼지만 이마저도 허사, 뾰족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 해(2003년) 성적부진으로 경질된 전임 백인천 감독의 뒤를 이어 8월부터 감독대행 직을 맡아오던 김용철 감독이 구단 윗 선과의 상의를 거친 후, 직접 마이크를 잡고 팬들에게 이승엽의 고의4구에 대한 불가피성을 설명하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서야 했다. 한동안의 시간이 흐른 뒤 마이크를 잡은 김용철 감독대행은 이렇게 얘기를 했다. “경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더 이상 실점을 해서는 안될 상황으로 판단했고, 더욱이 1루가 비어 있어 어려운 이승엽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팬들이 이승엽의 홈런을 기다리시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감독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라고. 김용철 감독대행의 저간 사정설명은 경기적인 측면에서는 충분히 납득이 되는 설명이었지만 팬들의 반응은 여전히 싸늘했다. 당시 롯데는 이 경기의 승패 여부를 떠나 이미 포스트시즌 진출 좌절은 물론 최하위가 일찌감치 결정된 상태였다. 이날 경기 전까지 롯데가 기록하고 있던 패수는 무려 89패(시즌 최종 91패 기록). 경기장을 찾았던 1만 1723명의 팬들 대부분이 경기 시작 전부터 내야석이 아닌 외야석 쪽으로 몰렸다는 점, 이날 경기를 전후해 평소 롯데의 사직 홈경기를 찾았던 관중수가 경기당 1000명을 넘기기 힘들 정도였다는 점등을 고려하면, 거의 대부분의 팬들은 롯데의 경기를 관전하러 왔다기보다는 이승엽의 홈런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중이었다는 사실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이 화근이었던 것이다. 물론 내 집 안방에서 상대팀이나 다른 팀 선수의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 내심 기분 좋을 리 없다. 감독대행의 처지에서 아무리 팀 순위가 확정된 상태라고 하더라도 매 경기 최선을 다해 이기는 경기를 하려 하는 것도 당연한 선택이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팬들의 민심(民心)을 깊이 읽지 못했다. 선거철이 되면 정당마다 늘 앞세우는 말이 한가지 있다. 민심을 겸허히 수용하고 받들겠다는 말이다. 선거에서 이긴 정당도 선거에서 패배의 쓴 맛을 본 정당도 모두 ‘민심’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자세와 목소리를 최대한 낮춘다. 아직까지 한국프로야구 최장 중단시간이라는 왕관(?)을 화려하게 쓰고 있는 2003년 9월 27일 롯데와 삼성전의 고의4구 해프닝은 팬들의 바람과 기대를 제대로 읽지 못했을 때 어떤 결과가 벌어질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의미 심장한 하나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2008년 10월 11일, 롯데는 정규리그 성적에서 압도적인(?) 3위를 차지하고도 4위팀인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5전 3선승제)에서 잇달아 3패를 당하면서 그토록 기다려왔던 ‘가을야구’에서 조기 하차해야 하는 아픔을 겪었다. 팬들의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큰 것은 당연. 경기가 끝나고 난 뒤 롯데를 응원하기 위해 대구구장을 찾았던 일부 팬들은 물병 등을 그라운드 안으로 내던지며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롯데와 조금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감독의 용병술에 대한 불만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패장 로이스터 감독이 1루측 응원단 앞으로 다가와 경기내내 열정적인 응원을 보냈던 팬들에게 거꾸로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모습에 팬들은 자칫 앙금으로 남을 수도 있었던 원망감을 모두 털어내야 했다. 더욱이 현장에서는 잘 몰랐지만 박수를 치고 있는 로이스터 감독의 그렁그렁한 눈에서 주루룩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해준 사진 한 장은 현장에는 없었던 대다수 롯데 팬들의 얼었던 마음마저 봄눈으로 바꿔놓고 말았다. 질 것 같지 않았던 경기, 질 수 없었던 경기를 내주고 만 참담한 결과를 선뜻 받아들이기란 팬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팬들은 이해를 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8년만에 이뤄낸 포스트시즌 진출 그리고 1년 내내 팬들을 살맛나게 해준 롯데에 대한 고마움으로 스스로를 위안 삼기로 했다. 프로야구계는 해마다 여러 가지의 제도보완과 규정의 변화를 추구해 오고 있다. 잘못된 부분을 과감히 고치고, 좀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기 위한 과정이다. 이번 겨울에도 올 시즌 처음 실시했던 끝장승부, 올림픽에서의 승부치기, 확대된 포스트 시즌 제도와 팀당 시즌 경기수(현 126경기) 등을 놓고 재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중 일부 항목에서는 현장과 프런트, 팬들의 생각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당연 현장의 목소리도 중요하고 팬들의 생각도 중요하다. 그래서 어느 한쪽만의 손을 선뜻 들어주기가 힘들 수 있다. 이럴 때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팬들의 마음, 즉 ‘민심’이다. 민심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겠지만, 설령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민심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선택이 이뤄져야 한다. 이승엽의 ‘고의4구 불가피성’을 1만여 팬들의 민심이 납득할 수 있었다면 관중소요로 인한 최장시간 중단이라는 희대의 해프닝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민심은 감독의 선택을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윤병웅 KBO 기록실장 온라인으로 받아보는 스포츠 신문, 디지털 무가지 OSEN Fun&Fun, 매일 3판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