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웅의 야구 기록과 기록 사이]선택 받은 10%가 넘어야 할 또 다른 장벽
OSEN 홍윤표 기자
발행 2011.01.18 07: 30

매년 대학교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내는 인원은 700~800명 안팎. 그러나 이들 중 프로팀의 선택을 받아 야구유니폼을 입게 되는 선수의 숫자는 불과 70~80명 내외다. 확률로 따지자면 채 10%에도 미치지 못하는 척박한 취업률이다. 계약금도 없는 신고선수라는 신분이라도 얻어 가까스로 야구인생을 연명할 수 있게 된 운 좋은(?) 선수들을 합친다 해도 여전히 야구취업률은 10%대 초반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신인 드래프트 행사장 뒤 켠에 서서 초조한 마음으로 자식의 이름이 호명되기만을 간절히 기도하는 부모들이나, 자신이 키운 제자들의 앞길이 활짝 열리기를 바라는 해당학교 야구감독들의 조바심을 생각해보면, 신인지명 행사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졌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이자 다행스러운 일인지는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예년처럼 지난 1월 6~7일에도 2011년 처음 프로에 발을 내딛게 된 신인선수들을 대상으로 하는 신인선수교육이 충남 예산에서 열렸다. 신고선수를 포함 100명이 약간 넘는 신인선수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 자리에 모인 것이었는데, 그 어느 해보다도 교육에 임하는 선수들의 눈빛과 자세가 진지했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선택 받은 이들 10%의 앞날에는 장미 빛 미래가 아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또 다른 10%를 향해 딛고 넘어야 할 거대한 장벽이 놓여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최근 5년간(2006~2010) 신인선수들이 소속 팀에서 기량을 인정받아 주전이든 후보이든 1군 엔트리 안에 이름을 올려 자신의 입지를 다진 경우들을 확률로 환산해보면 이 역시 10%를 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06년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최우수선수와 최우수 신인선수를 동시 석권한 류현진(한화)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신인선수들이 프로에 입문해 자기임무와  자리를 잡기까지 소요되는 시간과 기간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그 만큼 기존 선수 층의 두께가 쉽게 깨고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두터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일까? 입단 첫해부터 빛을 발하기보다 짧게는 2년에서 길게는 몇 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색깔을 인정받는 늦깎이 신인들이 최근 늘어나고 있다.
그 이유는 프로의 기량이 아마야구보다 여러 수 높은 관계로 웬만한 실력을 가지고는 바로 실전에 투입되기가 어렵고, 그에 따라 신인급 선수들이 1군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와 적응기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실력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중고 신인의 경우에는 자신의 기량을 만천하에 보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와 결과적 성과가 함께 찾아와야 하기에 성공에 이르는 길은 더욱 험난하기 마련이다.
2007년 세인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입단한 김광현(SK)은 데뷔 첫해에 고작 3승만을 따내는데 그치며 고전했지만 이듬해 16승으로 다승 1위에 오른 것은 이름 값에서 그렇다 치고, 2002년과 2007년에 데뷔했던 최형우(삼성)와 양의지(두산)가 세월을 훌쩍 넘긴 시점인 2008년과 2010년 중고 신인자격으로 각각 신인왕에 오른 것은 앞서 말한 경우의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이 밖에도 롯데의 이재곤(2007년 지명)과 전준우(2008년), 고원준(2009년), 삼성의 차우찬(2006년)과 이영욱(2008년), 오정복(2009년), 히어로즈의 강정호와 황재균(2006년), KIA의 양현종(2007년) 등이 입단 이후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는데 있어 여러 해가 소요된 경우들이다.
이번 신인선수교육에서 대다수 야구선수 및 지망생들의 우상인 ‘양신’ 양준혁이 강사로 나서 새내기 선수들 앞에 선 것은 그 등장만으로도 선수들에게 던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 하겠다. 특히나 강사 양준혁을 맞이하는 선수들의 환호성이 유달리 컸다는 것은 신인선수들의 피부와 마음에 전달된 동기부여적인 울림이 보다 각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프로에 입단하기 보다 더 어려운 살아남기 위한 힘겨운 생존확률 10%에 도전해야 하는 꿈나무 선수들이 양준혁을 스타성에 비중을 둔 단순한 선망의 대상이나 우상으로서의 느낌만으로 만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타격관련 개인 타이틀을 여러 개 따내긴 했지만, 양준혁 스스로가 말했듯이 언제나 2인자였던 자신의 위치를 탓하기보다 주어진 자리에서 언제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기에 지금은 만인 앞에 당당한 전설적 1인자로 설 수 있었다는 점을 새싹들은 항상 기억하려 애써야 한다.
순간순간의 스탯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지만, 꾸준함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아무나 넘볼 수 없는 높은 성이 되었다는 것은 출발선상에 선 선수들이 어떠한 마음가짐으로 선수생활에 임해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등대이자 불빛 같은 명제이다.
이 정도면 됐다고 자신과 타협하거나, 현실에 안주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한 편안한 길보다 진일보를 위한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을 시도했던 그의 진지한 야구철학. 잘 맞았던 빗 맞았던 언제나 1루로 전력질주 하던 모습들, 자신의 기록욕심을 내세운 무리한 타격보다는 4구를 골라 나가는 것이 팀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던 그 마음.
그래서 양준혁은 모두가 주목한 화려한 개인통산 최다홈런(351개)이나 최다안타(2318개) 기록보다도 "개인적으로 통산 최다 4사구(1380개) 기록을 가장 값어치 있게 생각한다"고 말한 그 내면을 읽어낼 필요가 있다.
이는 비단 선수들에게만 국한되는 말과 요구는 아니다. 양준혁이 은퇴 후 많은 곳을 들러 그가 선수생활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들을 이야기하는 기회를 자주 갖게 되는 이유는 ‘양준혁’이라는 이름값에서 오는 단순한 흥미나 재미만을 앞세운 예능인적인 측면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가 배울 것이 많다고 사람들이 인정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일천한 과거에는 가질래야 가질 수 없었던 유명선수의 실패담과 경험담을 직접 귀로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우리 신인선수들에게 생겼다는 사실을 바라보며, 출범 30주년을 맞는 한국프로야구가 그간 참 많이도 풍성해졌구나 라는 생각이 새삼스레 밀려든다.
  "기록의 사나이라고 불리기보다는 1루까지 항상 전력질주하던 선수로 기억되길 원합니다"
미국이나 일본프로야구 역사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수많은 선수들이 은퇴식이나 명예의 전당 입성식에서 던진 말들이 야구계의 명언으로 남아 후세에 길이 전해지는 모습들이 부러웠는데, 이젠 우리도 프로야구무대에서 겪은 경험과 사연들을 가지고 야구선배들이 후학들에게 가슴에 새겨둘 만한 명언들을 전할 수 있는 시대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마음 뿌듯한 요즘이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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