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웃(Black out).’
무대에서의 암전이나, 브라운관 화면이 갑자기 까맣게 변하는 것을 뜻하는 화이트 아웃의 반대말 쯤 되는 단어다.
조명이 일제히 꺼지고 암흑이 내려앉은 야구장. 순간 스탠드는 마치 반딧불이가 날기라도 하는 양, 관중들이 흔들어대는 휴대폰 불빛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한국시리즈 우승 세리머니나 대선수 은퇴식 등의 아주 특별한 행사가 열리는 날이 아니면 야구장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지난 4월 16일, 삼성과 두산의 경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대구구장에서는 경기 중 '정전'이라는 사상 초유(?)의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그간 무더운 여름철 과다한 전력사용에 의한 기계적 과부하로 야구장의 전기가 나가는 일이 가끔 있긴 했지만, 이번처럼 플레이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도중에 정전사태가 갑자기 들이닥친 경우는 처음이었다.
두산이 3-2로 앞서 가던 8회초 1사 후, 초구에 1루쪽으로 기습 드래그 번트를 시도한 정수빈의 타구를 삼성 1루수(박석민)가 달려나와 잡으려던 찰나,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1루 베이스커버를 들어가던 투수 임현준과 1루에 거의 다다랐던 타자주자 정수빈이 오후 7시 28분 시야에서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10여 분 뒤, 정상적인 수순을 밟듯 야구장의 조명탑에 불이 다시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총 6개의 조명탑 중 좌익수쪽 파울선 끝자락에 자리한 조명탑 하나는 끝내 불이 들어올 줄 몰랐고, 사고 발생 48분이 지난 밤 8시 16분, 결국 조명시설 고장으로 인한 서스펜디드 게임(일시정지경기)으로 처리되고 말았다.
이는 프로야구 역사상 조명시설 고장으로 인한 2번째 서스펜디드 게임에 해당(우천중단이 원인이 된 사례를 포함하면 총 6번째)된다.
1999년 10월 6일 쌍방울과 LG의 더블헤더 2차전(전주구장) 1회 진행 중, 해가 저물어 조명이 필요한 시점에서 조명탑 고장으로 불이 들어오질 않자 서스펜디드 게임을 선언한 것이 최초이다.
당시 그 경기는 이틀 뒤 재개된 바 있다.
메인 변압기 고장이 원인으로 알려진 기술적인 문제는 그렇다치고, 이날 벌어진 정전 해프닝에 얽힌 야구적인 문제들에 대한 질문들이 줄을 잇고 있어 이번 기회를 통해 그 내용들을 조목조목 따져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한다.
왜 콜드게임이 아니라 서스펜디드 게임일까?
통상적으로 야구경기는 5회를 넘기지 못하면 아무리 점수가 많이 났더라도 노게임이 된다. 그러나 경기중단 원인이 우천 등의 날씨로 인한 중단이 아니라 이번 경우처럼 조명시설이나 야구장 기계장치의 고장이 원인이 된 경우에는 정식경기의 최저 인정 기준요건인 5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경기가 시작되고 중단된 시점에서 이닝에 상관없이 그대로 서스펜디드 게임이 된다.
가장 흔한 것이 조명시설 고장이지만, 한 예로 야구장내의 스프링 쿨러 시설이 경기 중 작동되어 도저히 멈춰지질 않는다면 역시 기계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콜드게임이 아니라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처리된다.
콜드게임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홈 팀이 앞서 있는 상황 또는 수비를 하다 불리한 상황에서 고의적으로 갑자기 조명을 끈다거나 하는 인위적인 장난(?)을 원천적, 제도적으로 막기 위해 제정해 놓은 규칙(야구규칙 4.12)이다.
정수빈과 투수의 기록은?
기습번트를 대고 뛴 정수빈의 번트타구를 잡은 1루수가 베이스 커버를 들어간 투수에게 송구를 제대로 했다 하더라도 그림상 정수빈의 발이 1루에 먼저 도달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었다. 정상대로라면 정수빈의 내야안타로 기록될 확률이 아주 높았다. 그러나 이는 심증일 뿐, 실제로 눈 앞에서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조명시설 이상 등으로 심판원이 플레이를 진행하기가 불가능하게 된 경우, 규칙(야구규칙 5.10)에 의해 일단 볼 데드(경기의 정지상태)가 된다.
부연 설명하자면 이번처럼 플레이 진행 중에 조명시설 이상이 생겼을 경우, 끝나지 않은 플레이는 무효가 된다. 조명시설이 고쳐지면 고장으로 무효처리 된 플레이가 시작되기 전의 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공격 측 주자가 아웃되었을 것 같으면 아웃으로 하고, 살았을 것 같으면 세이프로 인정하면 전혀 무리가 없을 것 같지만 야구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종목이다. 아웃일 것 같은 상황에서 악송구가 일어나기도 하고, 세이프일 것 같은 상황에서 주자가 루를 공과해 아웃되기도 한다. 한마디로 변수가 많다.
그런 이유로 눈 앞에서 완성되지 못한 플레이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무효 판결을 내리고 있다. 정수빈은 하필 그 순간 찾아온 정전으로 인해 안타 하나를 손해 본 꼴이지만 결과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다음날 재개되는 경기에서 정수빈은 다시 타석에 들어서야 한다. 아울러 정수빈의 기록이 없었던 일이 되는 것과 연계해서 투수 임현준이 던진 초구 역시 볼 카운트 상 무효가 된다. 다음날 정수빈을 상대로 초구부터 다시 투구해야 한다.
더블 플레이를 하고 있는 동안 조명에 이상이 생겼다면?
최초의 아웃이 성립된 이후, 두 번째 아웃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조명이 꺼져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면 최초의 아웃 조차도 성립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수비측에서 볼 때 억울할 수도 있는 내용이지만 역시 야구는 결과를 모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무효처리 된다.
흔히 6-4-3(유격수-2루수-1루수)으로 이어지는 더블 플레이 때, 유격수의 송구로 1루주자를 먼저 포스아웃 시킨 2루수가 등을 돌려 1루로 송구하는 과정에서 캄캄한 정전이 되었다면 1루주자의 포스아웃도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타자주자가 1루에서 2루수의 송구로 아웃 되었을 지, 아니면 되레 악송구로 2루까지 진루할 수 있었을 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1사 주자 만루에서 수비측이 위와 같은 6-4-3의 더블 플레이를 시도했다고 가정할 때, 정전을 수비쪽에 유리하게 해석하자면 2루수의 1루송구로 더블 플레이가 가능(이닝 종료)하지만, 만에 하나 악송구가 일어났다면 2루주자와 3루주자가 모두 홈을 밟는 일까지도 가능해진다. 오히려 수비쪽이 불리해지는 여지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안전진루권이 주어지는 상황의 정전도 무효?
타구 또는 투수의 송구나 야수의 송구 등이 규칙에 의해 주자에게 안전진루권이 주어져야 하는 상황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정전이 발생했을 경우, 주자들의 주루 플레이가 완료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주자들의 주루 플레이는 유효로 한다.
가령 4사구나 보크, 포수나 야수의 타격방해, 주루방해 등으로 주자가 안전하게 진루할 수 있는 상황에서 조명이 나갔다고 한다면 이때의 주자들은 규칙(야구규칙 7.05)에 의해 주어지는 루에 대한 안전 점유권을 인정받는다. 극단적인 예로 홈런성 타구가 외야 스탠드를 향해 날아가는 동안 조명이 꺼졌다고 한다면, 그 타구가 홈런으로 인정받기에 충분한 궤적과 시각적 근거가 확실할 경우, 위의 규칙에 의거 홈런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다. 물론 심판원의 확신이 선결 전제조건이며, 상황이 애매하다면 무효다.
선수들의 기록통계 처리는?
4월 16일 삼성과 두산 경기에서 일어난 투타 개인기록들은 일단 공식적인 통계에서 모두 제외시킨다. 잠정적으로 일어난 결과들을 보관하고 있다가 나머지 경기가 마저 치러지면 그 때 가서 합산 처리된다. 완전 종료되기 이전까지는 미완성경기로 간주되는 것이다.
일단 당일 일어난 기록들은 먼저 합산해도 괜찮을 것 같지만 가장 큰 걸림돌은 주자가 있을 경우 투수의 자책점 결정이 문제가 된다. 특히 이닝 중간에 경기가 잘렸다면, 중간에 투수가 교대되고 실책까지 곁들여 있다면 투수의 평균자책점 기록은 당일 벌어진 상황만으로는 도저히 결과를 도출해낼 수 없다. 자책점은 이닝이 끝난 뒤 실책과 패스트 볼을 제외하고 이닝을 재구성한 뒤라야 계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김현수의 연속경기 안타는?
두산 김현수는 4월 15일까지 15경기 연속안타를 기록하고 있던 참이었다. 2010년 9월 20일 넥센(목동구장)전부터 이어오고 있는 기록이다. 그런데 16일 3번타자 김현수는 앞서 3번째 타석까지 안타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4번째 타석이 돌아오는 8회초 바로 앞 타순에서 경기가 서스펜디드 게임이 된 것이다.
그러나 김현수의 연속경기 안타기록은 서스펜디드 게임 선언만으로는 중단이 되질 않는다. 16일자에는 안타가 없었지만 만일 다음날 또는 훗날 재개된 경기에서 김현수가 안타를 때려낸다면 연속경기 안타 기록은
16경기로 늘어난다. 야구규칙 10.24에 의한 조치로 서스펜디드 게임의 잔여분을 치르면서 발생한 모든 기록은 원래의 경기일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17일 재개된 경기의 8회초 마지막 타석에 들어선 김현수는 삼진을 당하며 기록행진을 멈춰야 했다)
중단된 경기 잔여분은 언제 치러지나?
일단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선언되면 나머지 경기는 훗날 동일 구장에서 동일 팀간 예정된 경기보다 앞서 거행된다. 그러나 동일 구장에서 남은 경기가 없다면 상대방 구장에서 남아있는 경기에 앞서 치러진다.
만일 상대방 구장에서도 두 팀간의 남아있는 경기가 없다면, 즉 시즌 최종전이 서스펜디드 게임이 되고 속개할 수 있는 일정을 잡을 수 없었을 때에는 서스펜디드 게임이 아니라 그대로 콜드게임이 된다.
속개 잔여경기의 개시시간은?
속개 경기를 몇 시에 시작해야 하는 지에 관해 규칙에 따로 명시된 사항은 없다. 따라서 이때는 원래 경기의 진행 진도가 우선적으로 감안된다.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된 대구구장의 16일자 경기의 잔여분은 17일로 예정되어 있던 본경기 개시 시간인 오후 5시 보다 2시간 앞선 오후 3시에 속개되는 것으로 최종 결정이 되었다.
이날 대구경기가 중단된 시점은 8회초였다. 남은 이닝을 기준으로 종료시까지의 소요시간을 유추해 볼 때, 대략 1시간 정도의 추가적 여유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 것이다.
그러나 경기가 4회나 5회쯤 중단되었다면 여유시간을 최소 2시간 이상으로 늘려 잡는다. 완전히 경기 초반이었다면 3시간 정도의 추가시간이 주어졌을 것이다. 만약 속개경기가 시간이 길어지거나 연장전에 돌입하는 바람에 뒤에 예정된 본 경기 경기개시 시간을 넘기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면, 본 경기는 속개경기가 종료된 뒤 20분 후에 돌입한다.
서스펜디드 경기는 경기개시 시간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따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더블헤더 경기개시 시간에 관한 규칙을 원용한다. 더블헤더의 경우, 첫 번째 경기와 두 번째 경기의 시간적인 갭을 20분간으로 두고 있다.
속개경기의 선수기용과 말판은?
속개경기의 기본은 정지된 상황 그대로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스코어와 아웃 카운트 및 볼 카운트는 물론이고 주자 상황, 투수와 타자, 야수 위치 및 공격 타순 역시 정지되었던 상황 그대로를 다시 세팅한 상태에서 경기를 재개해야 한다. 판정의 일관성을 위해 심판원이나 기록원도 가능하다면 원래 경기를 맡았던 담당자가 그대로 잇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일정상 여의치 않다면 바뀔 수도 있다. 경기 진행요원에 관해 구체적으로 정해놓은 바는 규칙에 없다.
아울러 선수교체에 관한 기본 원칙은 다음과 같다. 원래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던 선수는 속개경기에 출전이 가능하다. 그러나 원래 경기에 출전했다가 다른 선수와 교대되어 물러난 선수는 속개경기에 출장할 수 없다.
한편 속개경기의 거행 날짜가 원래 경기와 달라진 관계로 현역선수 등록 자체가 변경이 되는 경우도 예상해 볼 수 있는데 여기에도 원칙이 있다. 원래 경기일에 등록선수로 올라있지 않았던 선수라도 속개 경기일에 현역으로 등록되었다면 속개경기에 출장할 수 있다.
또한 원래 경기에 출전했다가 다른 선수로 교대되어 속개경기의 출전자격을 상실한 선수가 등록 말소되는 바람에 다른 선수가 대신 등록되었다면 그 등록선수 역시 속개경기에 출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원래경기에서 교체 통보가 발표된 투수가 당시 타자를 처리 완료하지 못하거나 공수교대를 이루지 못한 채 서스펜디드 게임이 되었을 경우에는 그 투수는 속개경기에 스타팅으로 출전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속개경기에 출전하지 않았을 때는 다른 투수와 교대한 것으로 간주되어 이후 속개경기의 잔여 이닝에는 출전할 수 없다.
이 조항은 단 몇 개의 투구수 만으로도 다음날 컨디션 조절과 생체리듬에 이상을 가져올 수 있는 투수만의 특수한 처지을 고려한 규칙이다.
이상 정전사태와 연관되어 발생할 수 있는 야구규칙과 관계된 내용들을 다뤄보았다.
정전으로 인해 갑자기 찾아온 암흑세계가 시청자들로선 일견 재미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야구장에서의 블랙 아웃 현상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일이다.
투수가 타자를 향해 던진 투구의 경우에도 문제가 되겠지만, 타자가 친 라인드라이브성 타구가 야수 정면이나 관중석으로 날아가는 도중에 불이 꺼졌다고 상상해보자. 아찔하기 그지없다.
과거 한국시리즈 우승의 극적 분위기 연출과 행사를 위해 조명을 최종 아웃 상황에 맞춰 일제히 내리는 시나리오를 서둘러 행동으로 옮겼다가 야수가 하필 그 순간 실책을 하는 바람에 경기가 끝나지 않아 다시 경기를 재개하는데 한참동안이나 애를 먹었던 인위적 정전 기억이 문득 새롭다.
밤하늘에 하얀 공이 날아가는 시각적인 청량감을 한껏 만끽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야구장 조명. 눈부신 그 광채만큼이나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되는 존재임을 새삼 느끼게 해준 봄 밤이었다.
윤병웅 KBO 기록위원장
<사진>삼성 라이온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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