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곡에서는 상대 진영을 말 그대로 쑥밭으로 만드는 무자비한 ‘괴물’이지만, 대회장을 떠나면 그의 태도는 언제나 묵직하고 진중하다.
24일 오전 지구 반대편 미국 텍사스 엘런에서 벌어진 '2026 LoL 월드 챔피언십(롤드컵)' 스위스 스테이지 서전. 톱 e스포츠(TES)를 상대로 한화생명이 거둔 23분 24-7 압승의 중심에는 ‘로크’로 무려 17킬을 폭발시킨 미드 라이너 ‘제카’ 김건우가 있었다. 오리아나 상대로 꺼내 든 파격적인 픽의 의미를 완벽한 무력으로 증명해 보인 그날, 전 세계 e스포츠 팬들의 찬사는 당연한 결과였다.
한 달 남짓 지나 롤드컵에 나선 그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OSEN과 롤드컵 화상 인터뷰에서 만난 그가 아시안게임 당시를 회상하는 목소리에는 조금의 과장과 포장도 없었다.

최근 국제무대와 대형 대회를 거치며 일부 스포츠 스타들이 거둔 성과 뒤에 따라오는 보상과 혜택을 가볍게 입에 올리거나 경솔한 언행으로 논란을 빚는 광경을 마주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요란한 수식어와 가벼운 태도가 스포츠의 본질을 흐리며 씁쓸함을 남기곤 한다.
그 씁쓸한 풍경 속에서 ‘제카’ 김건우가 보여준 태도는 그야말로 격이 달랐다.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해 금메달을 거머쥐며 병역특례라는 소중한 결실을 안았을 때도, 그는 혜택 그 자체에 도취되지 않았다. 당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에 있어서 되게 감사하고 소중한 기회”라고 겸손함을 보이면서도, 그가 오롯이 집중했던 지점은 확고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그 목표보다는 같이 고생했던 동료들과 팀원들을 위해서 또 응원해주신 팬분들을 위해서 일단은 최선의 좋은 결과를 먼저 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화제가 되었던 당시 인터뷰의 배경을 묻는 질문에 김건우는 “막 늦게 오히려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했고, 아시안게임 자체가 팀이 아닌 나라를 대표해서 나가는 그런 대회다 보니까 확실히 책임감이나 부담감이 컸다”며 “그 부담감과 책임감을 이겨내고 금메달을 땄을 때 너무 만족스러웠기에 자연스럽게 나왔던 것 같다”고 덤덤히 털어놓았다.
꾸며낸 수사가 아닌, 거대한 중압감을 정면으로 돌파해 본 자만이 뱉어낼 수 있는 진짜 ‘진정성’이었다.
대회장을 떠나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의 태도는 언제나 한결같다. 숙소와 연습실을 오가며 온통 다음 대회와 경기 생각뿐이라는 청년, 늦은 새벽 대서양 건너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을 향해 “팬들께서 푹 주무실 수 있도록 앞으로도 경기를 깔끔하고 빠르게 끝내겠다”며 환하게 웃어 보인 김건우.

오랜 세월 e스포츠 현장을 지켜보며 수많은 선수들의 영광과 좌절을 기록해 왔지만, 진정한 레거시는 단지 경기를 잘하는 것만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화려한 플레이는 순간의 환호를 부르지만, 무대 밖에서 자신이 짊어진 자리의 무게를 무겁게 여길 줄 아는 태도는 오랜 세월 기억될 깊은 울림을 남긴다.
실력과 인성, 그리고 태극마크의 진정한 무게를 아는 그의 올곧은 발걸음이야말로, 겉치레에 갇히기 쉬운 현대 스포츠계에 던지는 가장 명확하고 묵직한 길라잡이가 아닐까 싶다. / scrapper@osen.co.kr